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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리즘'을 옹호하며

<PD수첩>을 지지할 수 밖에 없는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8. 12.



낙하산 사장이 투하된, 그래서 '24시간 편파방송'이 우려되는 YTN과
무도하게 사장이 쫓겨나고 '국민의 방송'에서 '정권의 방송'으로 거듭나는 KBS의
다음 희생양이 될 곳으로 지목되는 곳은 바로 마봉춘, MBC입니다.

마봉춘은 '언론독립'의 '낙동강전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자존심, 마봉춘을 지키자는 책이 '프레시안북'에서 나왔습니다.
25명의 필자가 '집단지성'의 힘으로 쓴
<MBC, MB씨를 부탁해>입니다.

우연하게 이 책의 필진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책의 홍보도 겸해서 책에 실었던 원고를 <독설닷컴>에  게재합니다.
제 원고보다 더 좋은 원고가 많으니 기회가 되시면 꼭 한 부씩 사주시기 바랍니다.  
 





<PD수첩>은 계속 ‘영혼이 있는 PD'들이 만들어야 한다.


요즘도 가끔씩 <PD수첩> 팀에서 출연 섭외 연락이 온다. 이명박 대통령의 언론정책을 비난하는 것처럼, 주로 다른 취재원들이 코멘트하기를 꺼려하는 내용에 대해서다. 연락이 오면 나는 무조건 달려간다. 왜 <PD수첩>이니까. 삼성 문제에 대해서는 주진우 기자가 나와 마찬가지로 ‘5분대기조’처럼 코멘트를 위해 대기하고 있다.


우리가 <PD수첩>의 부름에 열일 제쳐두고 달려가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큰 신세를 졌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PD수첩>은 결국 옳았다’는 맹신 때문이다. <PD수첩>의 부름에 달려가서 인터뷰를 두 번 했는데, 두 번 다 편집되어 방영되지 않았다. 그래도 행복하다. <PD수첩>이니까(하지만 세 번째는 화를 낼 지도 모르겠다. ㅋㅋ).


2006년 경영진의 무도한 삼성기사 삭제사건으로 빚어진 ‘시사저널 사태’를 <PD수첩>은 두 번에 걸쳐서 다뤄주었다. 재방송이 아니라 다른 주제로 두 번 다뤄주었다. 두 번의 방송으로 편집권 독립을 위한 ‘시사저널 파업’은 일반인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고, <시사IN> 창간의 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PD수첩> 말고도 고마워할 곳은 많다. ‘시사저널 파업’이 그나마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미디어오늘-기자협회보-오마이뉴스-프레시안-한겨레신문(한겨레21) 등이 꾸준히 보도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삼성그룹이 ‘이학수 전략기획실장의 인사 전횡’을 문제 삼은 시사저널 기사를 광고 압력으로 뺀 것은 우리 언론계의 열악한 현실을 보여준 단적인 예로, 기사가치가 컸지만 보도하는 곳은 적었다. 


그러나 ‘양심에 따라 기사를 쓸 수 있는 기자의 기본 권리’에 대한 중요한 문제였지만 주류 언론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특히 조중동은 완벽하게 외면했다. 조중동의 시각에서는 사장이 기자들 몰래 인쇄소에서 기사를 빼는 것은 ‘사태’가 아니었기 때문인지, 전혀 다루지 않았다. 그런 무관심을 ‘차라리 문제를 왜곡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기사가 고팠다. 우리가 왜 문제제기를 하는지 제대로 알려지기만 한다면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고,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음이나 네이버 대문에 기사가 한 번만이라도 나왔으면, 방송사 9시 뉴스에 보도가 한번만이라도 되었으면 하고 애를 태웠다. 결국 소원은 이뤄졌다. 그러나 너무 늦게 이뤄졌다. 기자들이 시사저널과 결별선언을 하고 모두 사표를 낼 때야 비로소 뉴스에 우리 소식이 나왔다. 


‘취재원의 입장이 되어보라’는 것, 선배기자가 후배기자에게 늘 충고하는 말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충고가 필요 없어졌다. 파업과 창간까지 1년여의 시간 동안, 아니 기사삭제 사건이 발생하고 파업과 창간을 거쳐 아직도 ‘안정적인 적자구조’에 허덕이는 지금까지, 너무나 절박한 취재원의 입장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펜을 잃은 기자들은 자신들의 하소연을 들어줄 펜과 카메라를 찾아 헤맸다. 


그때 <PD수첩>이 우리에게 왔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것은 드문 일이었다. 내 기억에 <PD수첩>에 두 번 다뤄지는 것은 주로 사이비 종교 문제였다. 문제를 드러낼 때 한 번, 한참이 지나도 그 문제가 계속되었을 때 다시 한 번. 사이비종교도 아닌데, PD수첩은 시사저널 사태를 두 번이나 다뤄주었다. 선의로 두 번 다뤄진 예는 ‘우토로 마을’ 사례를 빼고는 없었던 것 같다.


<PD수첩>이 시사저널 사태 방송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이후 황폐화된 우리 농촌의 문제를 다룬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편이 당시 MBC 사장의 일방적인 지시에 의해 방송되지 못한 경험을 <PD수첩> 역시 가지고 있었다. 이 사건은 이후 MBC 파업으로까지 이어졌다.


시사저널 기자들이 황우석 보도 이후 위기에 몰렸던 <PD수첩>을 보호하는데 일조 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모두가 <PD수첩>을 비난할 때, <시사저널>은 <PD수첩>의 진정성을 믿어주었다. 끝내 <PD수첩>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시사저널>은 <PD수첩>을 그 해(2005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 해 올해의 인물 선정과정은 쉽지 않았다. 올해의 인물은 기자단 투표에 의해서 후보가 선출된 후 토론을 통해서 확정되는데 그 해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청계천 복원 사업의 성공으로 강력한 대선후보로 떠오른 이명박 서울시장으로 선정하고 이미 인터뷰도 진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막판 기자단 난상토론 후 <PD수첩>으로 ‘급’변경되었다. <PD수첩>과 이명박 대통령의 악연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것 같다.


2007년 2월6일,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편이 방영되기 직전,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은 미리 기자회견을 열고 물타기에 나섰다. ‘기사가 명예훼손의 여지가 있었다. 반론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익명을 남발했다’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편집권은 편집인의 것이라 사장이 기사를 뺄 수 있는 것이고, 편집인에게 귀속된 편집권 독립을 주장하기 위한 기자들의 파업은 경영권 간섭이라 불법 파업이라는 ‘상식 이하의 주장’을 내세웠다.


하지만 언론은 그 뒤 이어진 시사저널 파업기자들의 반박 기자회견에 더 주목했다. 파업기자들은 금 사장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공익성과 공공성의 측면에서 명예훼손 면책 사유가 충분하다는 것, 반론 기회를 주었지만 삼성이 반론을 하지 않고 로비에만 전념한 것, 익명을 보완할만한 팩트가 충분하다는 것’ 등을 설명했다.


사실 이런 반박은 불필요했다. 금 사장의 기자회견에서 기자협회보 이대혁 기자(현 한국일보)가 “그런 문제를 지적하려면 기사를 보고 삭제를 지시해야 하는데 금 사장님은 기사를 보지도 않고 삭제를 지시하지 않았나?”라고 말한 것에서 이미 결론은 나 있는 문제였다. 금 사장은 보지도 않은 기사의 문제를 짚어냈던 것이다. 


그런 소동이 있었던 날 밤, 드디어 <PD수첩>에 시사저널 사태가 방영되었다. 마음이 설레었다. 오래 기다리던 영화를 보기위해 극장에 갔을 때보다 더 설레었다. 광고가 끝나고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이 삼성본관에서 항의 기자회견을 하는 과정에서 삼성그룹 보완업체 직원들로부터 폭행당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시사프로그램으로도 감동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느껴 보았다.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 편을 만들었던 PD는 후덕한 인상의 강지웅 PD였다. 우리에게 감동을 준 대가로 강 PD(와 MBC)는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으로부터 2억5천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당했다. 그러나 그(와 MBC)는 한 푼도 물어줄 필요가 없었다. 법은 금 사장의 ‘몰상식’을 편들어주지 않았다. 


재판부는 금 사장이 시사저널 사태를 보도한 MBC와 강 PD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 “보도된 내용이 원고들에 대한 명예훼손적 사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도된 내용은 모두 진실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어 위법성이 없다”라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파업 과정에서 고소고발을 남발했던 금 사장은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어야 했다.


금사장에게 고소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강 PD를 위로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반응을 잊을 수 없다. 나는 그에게 ‘금고모, 금창태 사장에게 고소된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된 것을 축하한다고 농을 걸었다. 그에게 비판적인 모든 사람에 대해 금 사장은 ‘고소 폭탄’을 꺼내 들었는데, 그 대열에 합류한 것을 축하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농에 그는 짐짓 감격해하는 목소리로 “제가 그동안 고소된 분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 것입니까? 너무 기쁜데요”라고 말했다. 


강PD가 가입 사실에 감격해 한 ‘금고모’의 면면은 화려했다. 정일용(당시 한국기자협회장) 최민희(전 민주언론시민연대 대표, 현 국회의원) 고경태(전 한겨레21 편집장, 현 한겨레신문 기자) 강지웅(MBC <PD수첩> PD)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 서명숙(전 <시사저널><오마이뉴스> 편집국장) 고재열(전 <시사저널> 파업기자, 현 <시사IN>기자)를 비롯해 <시사저널> 노동조합 집행부 6명,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운영진 6명이 회원이었다.


‘금고모’에 자격 조건이 살짝 미치지 못해 정회원이 되지 못한 유명인이 있다. 바로 손석희 교수다. 금 사장은 시사저널 사태를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여러 차례 다뤘던 손 교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결국 고소하지 않았다. 바라지도 않았겠지만, 손 교수는 정회원이 되지 못했다. ‘금고모’는 금 사장을 ‘무고’ 혐의로 공동 고소하려 했다가, <시사IN> 창간에 주력하기 위해 하지 않았다.


<PD수첩>은 7월에 다시 <기자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으로 시사저널과 결별선언을 하고 신매체 창간을 준비하는 기자들 이야기를 담았다. 이번에는 이춘근 PD가 담당이었다. 이 PD는 군대 훈련소 동기였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전우를 다시 보는 것만큼이나 반가웠다. 이 PD는 훈련소에서 여러 번 개인기를 선보이는 등 재능이 많아 예능PD가 되었을 줄 알았는데, 까칠까칠한 시사PD가 되어 있었다.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 편이 시사저널 사태가 대중적으로 알려지는데 기여했다면, <기자로 산다는 것>은 시사IN 창간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PD수첩을 통해 신매체 창간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억원의 성금이 몰려들었다. 그저 손가락만 빨고 있었던 기자들은 그 성금을 기반으로 <시사IN> 창간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삼성공화국, 언론은 침묵하라?> 편이 논리에 호소했다면 <기자로 산다는 것>은 다분히 감성적이었다. 파업기자들은 내내 울었다. 특히 시사저널과 결별선언을 하며 국화꽃 한 송이를 바치는 장면은 ‘눈물의 바다’였다. 굳은 맘을 먹은 덕분에 그날 울지 않았던 나도 화면을 보고서는 울었다. 지금도 눈이 건조하고 뻑뻑해지면 이 장면을 다시 보면서 눈물을 뽑아내는 민간요법을 쓰고 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 PD에게 말했었다. “보수의 문제가 무엇인줄 아는가? 부패? 아니다. 부패 이전의 문제가 있다. 바로 몰염치다. 보수정부가 들어서면 MBC도 ‘몰염치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게 될 때가 올 것이다. 그때 꼭 은혜를 갚겠다”라고. 안타깝게도 이 불안한 예언이 들어맞고 있는 것 같다.


보수 정부와 조중동이 가장 집요하게 매달릴 일이 바로 방송 민영화를 통한 언론장악이라고 보았는데, 예상대로 후안무치하게 달려들고 있다. ‘몰염치 보수’를 이야기 할 때 “우리의 오늘은 당신들의 내일이다. 우리가 겪는 일을 잘 봐둬라. 내년에 똑같은 일을 겪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을 하겠다”라고 말했는데, 이제 실천할 때가 온 것 같다. 


MBC는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을까? 나는 MBC를 믿는다. 그러나 걱정되는 것은 ‘완장들의 발호’다. 세상이 바뀌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 ‘완장’을 차고 나타난다. 시사저널 파업 때도 그랬다. 위기를 기회로 삼으려는 몇몇 직원들이 기자들을 욕하고 기자들의 멱살을 잡으며 ‘구사대’ 역할을 자처했다. 역겨웠다. 그 역겨움을 MBC도 겪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와 관련된 복선이 있었다. 시사저널 사태와 관련해 삼성의 언론통제에 대한 세미나가 열렸을 때 참석했던 MBC 이상호 기자가 힌트를 주었다. 그는 시사교양국에서는 삼성 문제를 줄기차게 제기하는데 보도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 보도국 내의 ‘삼성장학생’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직속상관이었던 모 데스크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폭로했다. 그리고 그 상관의 방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구찌 핸드백 파문’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로 스카웃되어 전무가 된 이인용 앵커도 삼성장학생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무’라는 장학금을 받았으니까. MBC 기자였던 노웅래 전 의원도 삼성장학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전직 삼성 출입기자 모임인 ‘프레스 라이온즈’ 멤버인 그는 당시 열린우리당 공보부대표였지만 우리들의 파업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의원실 보좌관들조차 의원 눈치를 보느라 ‘시사모, 시사저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하지 못했다.


걱정되는 것은 MBC에 ‘이명박 장학생’이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시기에 이들이 완장을 차고 나타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구본홍은 막아냈지만 제2 제3의 구본홍이 달려들 것인데 그때마다 잘 막아낼 수 있을 지, MBC 주조정실을 난입한 만민교회 신도들처럼 이들이 갑자기 <PD수첩>의 방송을 중단시키고, 세링기티 초원을 달리는 얼룩말 모습을 내보내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


<시사IN> 창간 당시, 제호 다음으로 고민스러웠던 것이 슬로건이었다. ‘적들도 믿는다(공식 슬로건은 아니라고 한다)’는 <알 자지라>의 슬로건, ‘돈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통역한다’는 <파이낸셜 타임즈>의 슬로건 같은 귀에 쏙 들어올 쌈박한 슬로건을 만들기 위해 기자들이 골머리를 앓았다. 이 궁리 저 궁리를 다하던 그 때 기자들에게 가장 많은 호응을 받은 슬로건은 ‘우리 시대의 정직한 보고자’였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직한 보고자’라는 슬로건을 내걸 수 없었다. 이미 <PD수첩>이 내걸고 있었기 때문이다(결국 ‘정직한 사람들이 만드는 정통 시사주간지’라는 싱거운 슬로건으로 결정되었다). 아쉬웠지만 그 주인이 <PD수첩>이어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PD수첩>은 지금까지 ‘우리 시대의 정직한 보고자’ 역할을 잘 수행해오고 있다. 앞으로도 그들이 ‘영혼이 있는 PD'로 남기를, 그래서 외압과 위협에 굴하지 않는 PD저널리즘의 전통을 이어가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럴 수 있도록 <PD수첩>과 함께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