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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리즘'을 옹호하며

언론인들이 대통령에게 고마워하는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11. 5.




기자들이 편해졌다.

PD들이 편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그만큼 불편해졌다.






지난 8월, EBS 김진혁 PD는 <지식채널e>에서 해방되었다. 적절한 소재를 찾느라 적절한 표현 방식을 고민하느라 날을 지새웠던 고생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3년 동안 분신처럼 키워온 <지식채널e>, 그 고감도 스트레스에서 ‘타의로’ 해방되었다. 더 이상 광우병 문제를 다룬 <17년 후>같은 아이템 때문에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을 일도 없어졌고 경영진에 불려갈 일도 없어졌다. EBS 또한 교육방송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과연?).

    
 
YTN 임장혁 PD도 <돌발영상> 제작 스트레스로부터 최근 벗어나게 되었다. 경영진은 후배 둘을 이끌고 하루에 3편씩 만들어내며 강행군을 하면서도 ‘낙하산 사장 퇴진 운동’에 앞장선 그의 노고를 인정해 ‘정직’ 처분을 내려주었다. 투쟁과 제작을 병행하느라 지칠대로 지쳐있던 임 PD는 비로소 합법적으로 쉴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동료들 역시 ‘<돌발영상>에 쓰일만한 화면을 찍어줘야 한다’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글쎄…).



KBS <시사투나잇> PD들은 조만간 지긋지긋한 ‘PD저널리즘’의 굴레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이 가장 싫어한다는 이 프로그램을 신임 이병순 사장이 폐지시킨다는 소문이 솔솔 돌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당일치기 아이템을 소화하느라 헉헉거리지 않아도 될 것이고, 자막 오류 등 방송사고 때문에 시말서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무엇보다 ‘속보성’이라는 기자 고유의 영역까지 침범한다며 보도국 기자들에게 받았던 질시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할 수 있었다(설마?). 



<미디어비평>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사실상 미디어 비평 기능을 상실할 것으로 예상되는 KBS <미디어포커스> 기자들도 곧 기자가 기자를 다루는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자들의 취재관행과 보도관행에 문제 제기를 할 때마다 자사 혹은 타사 선후배로부터 들었던 원망을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아울러 '조중동 스토커'라는 오명도 벗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악역을 맡은 자의 비애'를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다들 고무되어 있다(진짜?).



KBS ‘탐사보도팀’ 기자들은 팀 해체 소식에, 이전처럼 출입처에서 주는 아이템이나 소화하고 이해당사자간의 논쟁을 중계하는 쉬운 취재로 회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권력자의 등기부 등본을 떼보고 숫자와 씨름을 하고, 기사가 나간 뒤에는 소송에 휘말리는 ‘파워 언프렌들리’한 입장에서 해방된 된 것이다(젠장!). 



KBS 1라디오 PD들은 1라디오 성격이 시사보도 채널에서 종합편성 채널로 바뀌면서 ‘시사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이슈 관련자를 수소문해 섭외하느라 수고할 필요가 없어졌다. 회사는 프로그램 개편에 앞서 인사를 통해 시사 프로그램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KBS 이사회의 무도한 사장 교체에 항의했던 고참 PD들을 음악프로그램이나 단파 프로그램에 보내는 배려를 하기도 했다(허걱!). 

 
 
회사의 세심한 배려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통령 라디오 주례 연설’을 띠 편성 해두어서 아침방송 제작진의 짐을 덜어 주셨다. 대통령 연설 덕분에 한 아이템씩 덜어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첫 라디오 연설의 경우 프로그램 안에서 아이템으로 다뤄져서, 이 프로그램 제작진은 현직 대통령을 처음으로 라디오 프로그램에 모시는 영광도 안게 되었다(씁쓸…). 



이들만 편해진 것이 아니다. 시사 프로그램이 기울면서 교양 PD 대부분이 편해졌다. 연차 낮은 PD들이 <시사투나잇> 같은 짧은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했다가 경험이 쌓이면 <추적60분> <이영돈의 소비자고발> 등 긴 호흡의 시사 프로그램으로 이동하는 ‘고난의 행군’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어졌다. 하더라도 연성 아이템을 소화하거나 만만한 사이비 종교 혹은 퇴폐업소를 공략하는 것으로 ‘면피’할 수 있게 되었다(쩝~).  



그런데 이 모든 이들보다 편해진 두 사람이 있다. <PD수첩> '광우병편'을 제작했던 김보슬 PD와 이춘근 PD다. 검찰의 수사에 항의해 회사에서 두 달 넘게 농성하고 있는 이들은 현업에서 배제되어 있다. 두 달 동안 집에 갈 수 없었다는 사소한 불편을 제외한다면 이들은 지난 두 달 동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한가한 PD였다. 이 모든 것이 이명박 정부의 '방송 선진화 작업' 덕분에 가능해진 일이다(브라보!)



TV와 라디오의 이런 변화 때문에 시사주간지, 특히 <시사IN>도 편해졌다. 그동안 시사 이슈가 TV와 라디오에 범람하면서 시사주간지의 입지가 흔들렸었다. 그런데 이제 TV와 라디오에서 시사가 약해지면서 다시 시사주간지의 입지가 살아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정부 비판 보도를 적극적으로 한 <시사IN>은 ‘최대 수혜주’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제작 과정에서도 혜택을 보았다. PD들이 자신의 프로그램에서 다룰 수 없게 된 아이템을 제보하고 기자들이 자신이 속한 언론사에서 내보내지 않는 기사를 제보해서 기사를 쓰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기자가 제보자로 나서면서 제보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시사IN>은 기사를 ‘날로 먹는’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기자와 PD들이 이런 지경에 이르는 동안, 개인적으로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지금 곤란한 상황에 빠진 PD들과 기자들은 ‘시사저널 파업’과 ‘시사IN’  창간 당시 적극적인 보도로 우리를 도왔던 이들이었다. 이들의 안타까운 사정을 블로그(고재열의 독설닷컴)를 통해 전하며 그때 입은 은혜를 갚을 수 있었다. 분규 언론사의 기자와 PD들은 블로그에 올린 자사 혹은 타사 소식을 접하며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었다. 



모두가 편해졌다.
기자들이 편해졌다.
피디들이 편해졌다.
그들에게 시달림당하지 않아 정권이 편해졌다.
그들과 경쟁하지 않아 <시사IN>이 편해졌다.
그들을 돕는 척 생색낼 수 있어서 내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그만큼 불편해졌다.
그들이 지극히 편해졌을 때, 세상은 비로소 불편해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조금 늦을 수 있겠지만, 뒤틀린 상식은 되돌려질 것이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백일을 버텼던 YTN 기자들은 백일을 더 버텨야 할지 모른다. 두 달을 버틴 <PD수첩> PD들은 2년을 버텨야 할 지도 모른다. 지방으로 발령받은 KBS 기자와 PD들은 해외로 발령이 날 수도 있다. 그래도 그날은 반드시 올 것이다. 그 날을 조용히 기다려본다.


주) <미디어스>(www.mediaus.co.kr)에 기고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