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인 사망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기자들 사이에서 한 전설적인 출판사 이름이 회자되었다. 유명인이 사망할 때마다 바로 그 주에 추모집이 나온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내 인물뿐만 아니라 해외인물 까지도. 그 출판사 다음 라인업에는 도대체 어떤 인물들이 올라와 있는지가 궁금하다며 ‘관장사’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이라며 혀를 끌끌 찼다.
김수환 장영희 노무현 김대중 법정... 연 이은 유명인 사망 소식에 출판계는 추모집으로 응수했다. 새로운 사망 소식에 새로운 기획이 더해졌는데, 점점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마치 ‘추모 백일장’을 보는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저렇게 다양하게 추모할 수 있는 것이구나’하는 감탄 뿐.
대체로 우리의 영웅서사는 죽음으로 완성된다. 이순신부터 안중근까지 우리의 영웅은 죽음으로 말한다. 성공의 정점에서 영웅서사가 완성되는 구미식 모형과 다르다. 우리에겐 영웅의 죽음이 영웅서사의 화룡점정이다. 거칠게 말하면 아직 죽지 않은 영웅은 미완의 영웅이고, 죽음은 영웅의 완성이다.
살아생전 그들은 우리 사회에 공기처럼 존재하거나 혹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이 커서 애증의 대상이었다. 김수환 장영희 법정은 전자고 노무현과 김대중은 후자다. 죽음과 함께 그들의 죽음은 크게 환기되었고 관심은 극대화 되었다. 아니 환기하는 정도를 넘어섰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는 “우리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슬프지 않았다”라는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분명 추모 과잉의 시대다. 왜 그럴까? 김수환 장영희 노무현 김대중 법정의 연 이은 죽음을 거치면서 유명인 죽음에 대한 일종의 클리세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우왕좌왕 했지만 이제는 영악해져 그들의 죽음을 어떻게 활용할 지 눈을 뜬 것이다. 사회 전분야에 걸친 현상이지만 출판계가 특히 그렇다.
‘엘레지’는 죽은 사람에 대한 애도 또는 침통한 묵상의 시를 뜻하며 그리스어의 엘레게이아(elegeiā 애도가)에서 유래된 말로 비가 ·애가 ·만가라고도 한다. 죽은 자(노무현)에 대한 그리움이 크다는 것은 살아있는 자(이명박)에 대한 불만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엘레지’는 현실, 혹은 현실권력에 대한 ‘알러지’라고 할 수 있다.
현실권력의 오만 무책임에 대하여 한국인은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눈물로 반응한다. 촛불이 현실권력에 대한 적극적 맞서기라면 추모는 현실권력에 대한 소극적 불복종이다. ‘어른을 잃은 사회’에 사회적 고아가 되어버린 듯한 집단 불안감이 표출된 것인데, 역으로 이것은 현실권력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한다.
현실권력의 불안감은 과거권력에 대한 컴플렉스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노무현을 통해서는 '꿈'을 이루려 했고 이명박을 통해서는 '욕망'을 충족하려 했다.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불만이 잃어버린 꿈을 추억하는 것을 겁냈다. 그 콤플렉스는 무리한 수사와 탄압으로 나타났다.
이 ‘엘레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때 정점을 이뤘다. 서거 전 검찰의 무도한 수사와 언론의 막장 보도를 막아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500만명 이상이 분향소를 찾고 사회 전체가 극도의 우울증 증세를 보였던 노무현 추모의 주된 정서는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죄송합니다)’였다.
그러나 이런 추모 열풍에 ‘생계형 엘레지’도 깃들어 있었다. 당장의 수익을 내기 위한 ‘인스탄트 추모’가 횡행했다. 부채를 부채로 해서 또 대출하는 이를테면 돌려막기와 같은 추모가 이뤄졌다. 추모의 조각을 모은 ‘컴필리에이션 추모집’이 대표적이다. 온갖 군상들이 그와 연관된 추억의 부스러기를 들고 와서 책을 꿰어 맞췄다.
노무현 추모를 위해 설치한 서점 매대를 보면 지뢰밭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노무현 책이 노무현을 죽이는구나’하는 한탄이 절로 나왔다. ‘노무현 관장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잉이었는데, 원고료도 받지 않고 기부했던 원고가 허접한 책으로 묶여 나온 것을 보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던 끔찍한 기억이 있다.
노무현 1주년 때 악몽은 재현되었다. 1년 전 경황이 없어 숟가락을 얹지 못했던 일군의 출판사들이 ‘관장사’에 뛰어 들었다. 지방선거를 위해 사자의 권위를 빌릴 필요가 있는 정치지망생들까지 더해졌다. 추모가 정치색을 띠면서 변질된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면서 진지한 추모 역시 묻혀버렸다.
웃음이 하루를 살아가는 양식이라면 울음은 한 해를 버티게 하는 씨앗이다. 슬픔은 기쁨보다 시효가 길다. 그래서 ‘엘레지’는 중요하다. 일시적인 추모에서 영원한 교훈으로, 그에게서 나에게로 이어지는 ‘추모의 정석’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추모에 질리지 않고 추모를 통해 오늘을 살아갈 힘과 내일을 살아갈 꿈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로 망자에 대한 추모의 교과서는 자서전이다. 물론 자기 자신을 가장 오독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수환 장영희 노무현 김대중 법정, 최소한 이들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이들은 자신을 돌아볼 줄 알았다. 치열하게 살면서도 외부로 분출하지 않고 안으로 삭힐 줄 았았던 이들에게 자서전은 추모를 위한 훌륭한 발제문일 수 있다.
교과서 다음은 참고서다. 자서전을 음미하고 풍부한 자료와 깊이 있는 분석과 냉철한 평가가 있는 전기를 곁들인다면 사자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자료를 긁어모은 책이 아니라 사자를 다양한 관점에서 관조할 수 있는 전기가 좋다. 그렇게 뼈대를 세운 이후에 다양한 읽을거리를 더한다면 한 사람의 인생을 풍부하게 음미하면서 내화 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획회의>에서 김수환『바보가 바보들에게』 장영희『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노무현 『운명이다』 김대중『옥중서신』 법정『무소유』를 조명한다니 반갑다. 이 책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우리시대의 어른에 대한 교과서다. 우리 시대의 기둥이었던 이들을 이해할 수 있는 기둥이다.그 사람이 인생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참된 추모가 가능할 것이다.
주> <기획회의>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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