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채플린의 말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를 가까이서 보면, 혹은 멀리서 보면 어떤 드라마일까? 멀리서 보면 사기극, 가까이서 보면 희극 정도가 아닐까 싶다. MB 식으로 표현하자면, ‘내가 정치부 기자 해봐서 아는데’ 가까이서 본 한국정치는 각본 없는 코미디였다.
대통령을 꿈 꿔본 적이 있다. 직접 되는 것 말고 만드는 것, 진짜 만드는 것 말고 드라마나 영화로 만드는 것 말이다. 이것도 일종의 ‘킹메이커’인 셈인데, 현실 정치에서 풀지 못한 ‘철인정치’에 대한 로망을 픽션으로 나마 풀고 싶었다. 진짜 직접 대통령으로 만들고 싶을 만한 사람을 내 생애에 보지 못할 것 같아서 허구로 라도 창조하고 싶었다.
그런데 이미 ‘대통령 시나리오’는 차고 넘친다. 여의도에는 299편의 대권 시나리오가 돌아다닌다고 한다. 국회의원 숫자만큼 말이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다들 비호감에 ‘듣보잡’들인데, 그들은 마음속에 고래 한 마리씩 품고 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 배지를 다는 순간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로드맵을 그린다고 한다.
자, 그 시나리오를 하나하나 꺼내보자. 아까 말했듯 각본 없는 코미디다. 먼저 꺼내볼 시나리오는 안상수 새누리당 의원의 시나리오다. 안상수 의원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이 코미디영화의 시나리오 제목은 ‘포탄을 탄 사나이’ 정도가 어떨까 싶다. 소품은 불에 그을린 포탄 정도만 있어도 된다.
조연은 누구로 세울까? 새누리당 안형환 의원과 황진하 의원이 좋을 것 같다. 이유는 이렇다. 연평도 포격사건 현장 방문 때 둘은 당 대표인 안상수 의원을 수행했다. 당시 현장 기자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보온병 포탄 사건’은 이렇게 전개되었다. 안 의원이 폭격 현장에서 보온병을 발견했다. 그리고 군 출신인 황 의원에게 포탄 탄피인지를 물었고 황 의원이 확인해 주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 의원과 황 의원이 새누리당 의원 중 드물게 병역필 의원이라는 점이다. 학사장교로 병역을 마치고 기자 출신인 안 의원이 포병부대 사령관 출신인 황 의원에게 확인까지 하고 당 대표에게 건넨 것인데, 안타깝게도 포탄이 아니라 보온병이었다. 포탄 탄피가 별책부록처럼 따라간 것일까? 황 의원은 그 보온병이 몇 밀리 포 탄피인지까지 어림짐작 해주었다.
한나절 만에 트위터에 패러디가 등장했다. 누군가 마트에 진열된 보온병들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메모했다. “트위터 친구 여러분, 저는 파주 이마트의 포탄 코너 앞에 와 있습니다”라고. 이후 안상수 의원은 ‘행방불명’ 사유로 병역을 면했던 것을 해명하며 “전쟁이 나면 입대하겠다”라는 호언장담을 하기도 하고 “요즘 룸싸롱에서도 자연산을 찾는다”라는 성희롱 발언을 하기도 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묘역에서 상석을 밟고 “오십견 때문에 실수했다”라고 변명을 하기도 했다.
실수연발이었다. ‘포탄을 탄 사나이’ 안상수는 아마 전쟁이 나면 오십견에도 불구하고 자원입대해 자연산 보온병을 양팔에 들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의 식량을 훔쳐 보온병에 담아서 행방불명되는 스토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이야기가 영화화 된다면 흥행하지 않을까?코미디가 100% 실화에 근거하고 있다니 얼마나 감동적인가?
한참 안상수 시리즈가 트위터에 유행할 때 옹호론과 신중론이 올라오기도 했다. ‘안상수 함부로 까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고 큰 웃음 준 적이 있더냐’라는 옹호론도 제기되었고 ‘안상수 까지 마라. 그러다 안상수 입조심하는 수가 있다’라는 신중론도 올라왔다. 아무튼 안타깝게도 이 시나리오는 탈락이다. 왜? 안상수 의원은 19대 총선에서 공천조차 받지 못했다.
다음은 강용석 의원 차례다. 사퇴했으니까 강용석 전 의원이 아니냐고? 안타깝게도 박희태 국회의장이 먼저 사퇴해서 그의 국회의원직 사퇴를 행정적으로 처리해주지 못했다. 그래서 고스란히 세비를 받으면서 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람보나 코만도처럼 고소 고발을 난사하는 이 ‘고소집착남’ 혹은 ‘모두까기인형’을 위한 시나리오의 제목은 ‘천개의 고소’ 정도가 어떨까?
최근 강 의원은 슈퍼스타K 시즌4 오디션에 응모해 상상력의 끝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우리의 상상력은 다양한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머물렀는데, 강 의원은 국회의원이 독특한 시도를 함으로서 역발상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그를 오디션하는 심사위원들은 아마 탈락시킨 뒤 고소 고발을 당하는 영예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고소집착남’ 강 의원에게 고소 고발을 당하는 것은 이제 ‘가문의 영광’이 아닌가 싶다. 얼마 전 박원순 서울시장을 트위터로 인터뷰하는데, 강 의원이 아들 병역문제를 꼭 물어봐달라고 트위터 멘션을 보내왔다. 그래서 싫다고, 질문 안 하면 나도 고소 고발할 거냐고 물어봤더니 강 의원은 “선거 준비하느라 바쁘니 선거 끝나면 고소해 드리겠다”라고 답을 주었다. 조그만 나도 그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강 의원이 최근 강적을 만났다. 통합진보당 청년 비례대표 후보로 응모했던 ‘고대녀’ 김지윤씨가 강정마을 해군기지 공사현장을 방문해 구럼비 바위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괴롭히는 해군을 ‘해적’이라고 발언한 것을 강 의원이 고발하자 작가 낸시랭이 이를 디스했다. 그러자, 강 의원은 낸시랭이 미국국적이라는 것을 공격하며 애국가나 외우고 오라고 역디스했는데 이에 대한 낸시랭의 반응은 '청와대 앞에서 다함께 애국가 4절까지 부르자'라는 것이었다.
강 의원과 낸시랭이 옥신각신하는 모습은 악연으로 만나서 인연으로 발전하는 전형적인 트랜디드라마의 클리세다. 강 의원의 고소로 법정에서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낸시랭이 법정에서 비키니 퍼포먼스를 벌이자 이를 보고 반한 강 의원이 프로포즈를 해서 둘이 함께 청와대 앞에서 손을 맞잡고 애국가를 4절까지 함께 부르며 끝이 나는 시나리오가 나올 것 같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강 의원은 또 다른 시나리오에 등장한다. 이번 시나리오의 여주인공은 탁월한 ‘고소감’으로 강 의원과 함께 ‘고소집착남녀’로 분류되는 전여옥 의원이다. 전 의원이 강 의원을 응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둘은 양화대교 커플로 묶였다(전 의원 지역구는 양화대교 남단이고 강 의원 지역구는 양화대교 북단이다). 트위터 이용자들은 둘의 도원결의에 대해 이번 총선에서 ‘옥석’(전여옥+강용석)을 가려내자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전 의원이 포함되면서 이 시나리오에는 공포물의 간지가 가미된다. 그래서 제목은 ‘나는 박근혜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정도가 어떨지 싶다. ‘박근혜는 대통령병 환자’라고 비난하는 전 의원은 박근혜 의원이 햄버거도 포크와 나이프가 있어야만 먹는다는 것을 비롯해 깨알 같은 폭로로 극의 긴장감을 더해주었다. 시나리오 제목은 ‘화성을 고소하는 남자, 금성으로 고소하는 여자’ 정도가 어떨까 싶다.
‘고소집착남녀’ 하면 나경원 전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나 전 의원은 특히 시사IN과 ‘나는 꼼수다’에 출연하는 주진우 기자에게 애정어린 고소 고발을 남발해 주었다. 크고 작은 고소 고발이 많았는데, 역시 관건은 1억 피부과 논란이다. 밝혀진 팩트만 가지고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1억 피부클리닉 관련 ‘진실게임’은 다음과 같다.
시사IN은 나 전 의원이 이용한 피부클리닉이 연간 회원제로만 운영되고 통상적인 회비가 1억이라는 것을 보도하고 증명했다(20대 여기자가 항노화과정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는 5천 만 원도 가능했다). 나 전 의원 측이 밝힌 것은 연간회원제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11회 이용)과 550만원을 지불했다는 것, 그리고 장애인인 딸이 항노화과정 치료를 함께 받았다는 것이었다.
이 둘을 조합하면 이렇다. 나 전 의원은 다른 사람은 연간 회원제로 회비를 1억 원 씩 내고 이용하는 피부클리닉을 딸과 함께 이용하고 딸이 비싼 옵션인 항노화과정 치료를 받으면서도 550만원만 주고 이용했다는 것이다. 남들은 1억원을 주고 회원제로 이용하는 곳을 나 전 의원은 딸과 함께 비회원제로 이용하고 550만원만 지불했다는 것인데, 억울할 게 뭐가 있나?
시사IN은 이 피부클리닉이 문제가 된 뒤에도 나 전 의원이 다른 피부클리닉을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추가로 보도했다. 나 전 의원이 새로 옮긴 피부클리닉도 견적을 내보았는데 클리닉 측은 20대 여성 2명에게 각각 3개월에 1800만원, 6개월에 2100만원 견적을 제시했다. 여기서 잠깐 시나리오 제목을 붙이고 간다면 ‘내 친구의 피부과는 어디인가’ 정도가 좋을 것 같다.
이 보도가 나간 후 공천 심사를 앞둔 나 전 의원은 이 피부클리닉이 시사IN에 명예훼손 소송을 냈다고 발표했다. 실제로 이 피부클리닉은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의 내용은 시사IN이 자기네 피부클리닉을 ‘호화클리닉’이라고 부른 것이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시사IN이 소송에서 지면 ‘청담동 싸구려 피부과’로 정정 보도를 해야 했을 것이다.
나 전 의원 측은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 때 박원순 시장의 고액 월세를 문제 삼았는데 박 시장 가족이 살고 있는 아파트의 월세는 6백만원 정도였다. 그런데 나 전 의원이 이용한 피부과의 ‘토탈 케어’ 비용을 시사IN 기자들이 받은 견적을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한 달에 350만원~600만원 정도다. 쉽게 말해서 박원순 시장 가족의 한 달 방세를 얼굴에 바르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화가 아니다.
호화란 무엇인가를 놓고 법정 다툼을 벌일 뻔 했던 이 소송은 진행되지 못했다. 병원 측이 고소를 취하했기 때문이었다. 취하하면서 해당 피부클리닉 측은 시사IN에 한 가지 부탁을 했다. 나 전 의원과 찍은 사진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얼굴을 가리기는 했지만 원장의 딸도 함께 찍어 나중에 딸아이가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다는 생각에 시사IN은 온라인기사에서 사진을 내려주었다. 기사와 관련해서는 제목이나 내용 중에서 한 자도 고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시사IN이 기사를 수정해서 소송을 취하했다’라는 식으로 기사들이 나왔다. 기가 찼다.
이것이 팩트다. 우리 정치의 현실이다. 18대 국회의 모습 그대로 영화를 만들면 다큐멘터리 코미디물이 한 편 나올 것이다. 정말 상상력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할 것 같다. 어떤 정치 영화에서도 이런 엽기적인 상상력을 본 적이 없다. 이제 19대 국회를 캐스팅할 날이 멀지 않았다. 이번에는 어떤 영화를 찍으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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