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 썼던 지하철 첫차와 막차의 풍경 차이입니다.
10년이 지났지만 그리 달라지지 않았을 것 같네요.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나는 이 얼굴들, 까맣게 젖은 나뭇가지 위의 꽃잎들.’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 정거장에서>)
지하철 첫차와 막차처럼 우리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드물다. 그러나 첫차와 막차가 가리키는 시각은 물리적 시간과 다르다. 새벽을 깨우는 첫차에는 삶에 지친 모습이 실려 있고 하루를 마치는 막차에는 흐느적거리는 젊음이 담겨 있다. 인천발 첫차와 인천행 막차를 타고 오가며 그 풍경을 살펴보았다.
지하철 첫차에서부터 삶의 경쟁은 시작된다. 지하철 첫차를 이용하는 승객은 생각보다 많다. 자리 경쟁도 치열해서 빈자리가 나면 근처에 서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뛰어든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양보를 기대할 수도 없다. 첫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아서 그런 자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앉은 사람은 모두 부족한 잠을 벌충하기 위해 눈을 감아버려서 동정의 여지를 기대할 수 없다.
첫차가 출발하는 인천역에서 젊은 여자 네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이 특이해 까닭을 물어보았다. 월미도에서 밤을 새워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이 첫차는 오히려 막차의 의미에 가까워 보였다. 한가한 첫차에서 마음껏 퍼질러 잘 요량이었는지 그들은 둘씩 머리를 맞대고 의자에 드러누웠다. 그러나 그들의 안락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정거장에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한 할아버지는 신문에 연재되는 영어회화 학습자료를 보면서 연신 중얼대고 있었다. 단어를 외우는 모양이었다. 한 번도 첫차를 놓쳐 본 적이 없다는 그는, 부평역 인근의 미군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팔뚝에 해병대 문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종로5가에서 노점상을 하는데, 일찍 가서 자리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늘 첫차를 탄다고 말했다.
기자가 얘기를 나눈 첫차의 승객들은 모두들 손목에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리고 첫차를 탄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시계를 차고 있었다(낮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사람 중에는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인생의 시계가 예민하게 작동하고 있는 그들의 초침 소리는 더 숨가쁘게 들렸다.
고요한 첫차에 비해 막차는 시끄럽기 그지없다. 마치 시골 장터 같다. 귀염둥이 딸과 휴대폰으로 통화하는 아빠, 괜히 옆 사람과 시비를 벌이는 취객, 친구들과 잡담을 하다 크게 웃는 대학생. 막차는 무척이나 소란하다. 막차에서 사람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정도씩은 컸다. 막차를 탄 사람의 절반 정도는 얼굴이 붉은데, 채 가시지 않은 취기가 그들을 호기롭게 만든 것처럼 보였다.
막차가 첫차와 다른 점은 타는 사람이 대부분 젊다는 사실이다. 치마를 너무 꽉 끼게 입어서 옆단 실밥이 터질 지경인 여고생, 미니 스커트를 입고서 세상 모르게 늘어져 자고 있는 여자, 출입문 옆에서 기둥을 붙잡고 있다가 문이 열릴 때마다 고개를 내밀고 구토하는 대학생, 서로 껴안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젊은 연인 등 막차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었다.
종점에 다다르면 번잡했던 막차는 황량해진다. 술 취한 취객 몇몇이 쓰러져 자고 있고 빈 의자에 신문지만이 널려 있을 뿐이다. 종점에 도착하자 아주머니 20여명이 객차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를 하는 데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았다. 신문지를 거두는 사람이 앞장을 서고 그 다음을 물 뿌리는 사람이 뒤따랐다. 그 뒤를 빗자루질하는 사람이 따라가고, 대걸레질을 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바닥을 닦아내면 청소는 끝이다. 뒤따라온 남자들은 취객들을 깨우고 있었다. 술에 취해 졸다가 종점까지 온 사람이 서너 명 눈에 띄었다.
역 앞 벤치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청소년이 앉아 있었다. 어린 노숙자였다. 벌써 몇 달째 집을 나와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지하철역에서 자는 데 이골이 난 그였지만 그 날 따라 운이 없었다. 직원들이 역사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잠근 것이다. 그는 할 수 없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벤치에 피곤한 몸을 누일 수밖에 없었다. 역 앞 상점도 모두 문을 닫고 사방이 캄캄해진 오전 1시, 어린 노숙자의 머리 위에서 ‘인천역’ 간판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하철 1~4호선, 개성도 제각각
1974년 지하철 1호선이 개통되었다. 1984년에는 2호선이, 1985년 3·4호선이 개통되면서 1기 지하철은 완성되었다. 1기 지하철이 완전한 꼴을 갖춘 지도 벌써 15년 세월이 흘렀다. 역사가 100년 가까운 유럽 나라들에 비하면 우리의 지하철 역사는 일천하다. 하지만 그 짧은 기간에 우리 지하철이 이룩한 성장은 눈부시다.
지난 5월24일을 기점으로 1기 지하철 이용 승객은 2백억 명을 넘었다. 2기 지하철(5∼8호선)까지 합하면 하루 이용 승객이 4백70만 명에 이른다. 수송 분담률도 33.8%로 가장 높다. 개통 당시 9개 역, 총연장 7.8km였던 규모도 2백31개 역에 총연장 256km로 늘었다. 세계에서 네 번째에 드는 규모이다.
오는 11월 6호선의 남은 구간이 개통되면 서울 지하철은 이제 완전한 모양을 갖추게 된다. 2기 지하철 개통은 단순히 지하철 노선이 확장되었다는 의미 이상이다. 승객을 태우고 나르는 데에만 급급했던 1기 지하철과 달리 2기 지하철에서는 지하 공간을 본격적인 문화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본격적인 ‘지하 문명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시사저널>은 이렇게 우리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쉬지 않고 달려온 지하철을 속속들이 들여다보았다.
지하철에서 소매치기나 성추행범을 잡는 지하철수사대 형사들은 현장에 나갈 때 변장을 한다. 그런데 어느 노선에 나가느냐에 따라 변장이 달라진다. 노선별 특성에 맞추지 않고 아무렇게나 차려 입으면 표가 나기 때문이다. 수사대의 한 경찰은 이렇게 말한다. “1호선에서는 노숙자나 취객으로 변장한다. 2호선에서는 대학생처럼 모자를 쓰고 가방을 메는 것이 좋다. 3호선에서는 신사복이 적격이다. 4호선에서는 장사꾼 복장이 잘 어울린다.”
지하철수사대 복장도 노선 따라 달라
왜일까? 노숙자와 취객은 1호선 주변에만 살고 대학생은 2호선만 타는 것일까? 신사는 3호선을 좋아하고 장사꾼은 4호선을 타야 장사가 잘 되는 것일까?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노인 아저씨 아줌마 회사원 대학생 청소년 어린이 등 별별 사람이 다 타고 하루에 수백만 명이 이용하는 지하철에 뚜렷한 특징이란 있을 수 없다.
그렇지만 각각의 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각각의 노선에 나름으로 색깔이 밴 것이다. 이처럼 호선 별로 조금씩 다른 특징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역세권 때문이다. 호선 별로 지나는 역 주변이 어떤 곳이냐에 따라 호선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다.
1974년 8월15일, 영부인 육영수 여사를 쓰러뜨린 총성과 함께 달리기 시작한 1호선은 우리나라 지하철의 맏형이다. 다른 노선보다 10년이 앞선다. 그리고 가장 서민적인 지하철이다. 8년째 1호선을 타고 통학한다는 하승탁씨(27)는 “1호선에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다른 호선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면 갑자기 분위기가 무겁고 어두워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지 낡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라고 1호선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1호선에 노숙자가 많은 이유
1호선에는 유난히 노숙자가 많다. 노숙자가 많은 까닭은 노숙자에게 밥을 주는 곳이 1호선 주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1호선만 타고 다니면 노숙자도 밥은 굶지 않고 다닐 수 있다. 2년째 노숙하고 있는 이 아무개씨(42)는 그 때문에 1호선을 애용하고 있다. “청량리역과 영등포역에는 2백 원을 받고 아침을 주는 곳이 있다. 점심부터는 공짜로 먹을 수 있는데, 용산역에서는 11시 반, 파고다공원에서는 오후 4시 반, 서울역에서는 저녁 8시에 밥을 준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하루에 네 끼, 다섯 끼도 먹을 수 있다.”
1호선에는 노숙자 못지 않게 노인도 많다. 낮에 노인이 많이 몰리는 파고다공원과 종묘공원이 1호선 주변에 있기 때문이다. 다른 노선과 달리 지상에 역이 많고 역사 시설이 비교적 단순해 이용하기 쉬운 것도 1호선에 노인이 몰리는 한 이유이다. 노인이 많은 까닭일까. 1호선에는 유일하게 여성·노약자 전용칸도 마련되어 있다.
1호선의 또 다른 특징은 역 주변에 윤락가가 많다는 점이다. 얼마 전 김강자 종암경찰서장에게 철퇴를 맞고 휘청거리고 있는 미아리 윤락가를 제외한 청량리·용산·영등포 등 서울의 유명한 윤락가는 전부 1호선 주변에 몰려 있다. 1호선의 종점인 수원역 주변과 인천역 근처에도 꽤 큰 윤락가가 형성되어 있다. 요즘 이곳 윤락녀들은 “미성년자 아니니까 괜찮아요”라고 말하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다. 김서장의 미성년자 매매춘 단속이 본의 아니게 성인 매매춘에 대해 면죄부를 준 셈이다.
대학 입시에 떨어진 재수생들이 분루를 삼키고 권토중래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재수 학원도 대부분 1호선 주변에 몰려 있다. 신설동역·서울역·남영역·노량진역 주변에는 대형 입시 학원들이 즐비하다. 지금은 충정로로 이사했지만 입시 학원의 대명사였던 종로학원도 얼마 전까지 서울역 부근에 있었다. 특히 노량진역 주변에는 대학촌에 버금가는 ‘재수생촌’이 형성되어 공부에 지친 재수생들의 시름을 달래주고 있다.
인천·수원·의정부 시민이 서울에 있는 직장에 가기 위해 한바탕 출근 전쟁을 치르는 곳도 1호선이다. 1호선 신도림역에서 근무하는 공익근무요원 성민규씨(28)는 “매일 아침 지하철을 타기 위해 바쁘게 뛰어 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게 된다. 1호선에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라고 말했다.
젊음의 지하철 2호선
순환선인 2호선은 젊음의 지하철이다. 주변에 대학이 많고 젊은 사람이 놀 수 있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홍익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 경기대 한양대 건국대 서울교대 서울대 등 10여 대학을 끼고 있다. 다른 노선에도 대학은 있지만 2호선만큼 대학이 특별 대접을 받고 있는 곳은 없다. 2호선에 있는 대학들만 유독 대학 이름을 단독으로 역 이름에 쓰고 있다(다른 노선에도 대학 이름이 쓰이는 경우가 있지만 대부분 지역 이름과 함께 쓰이고 있다). 서울대입구역의 경우 정문으로부터 2km 이상 떨어져 있어 입구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지만 당당히 역 이름을 꿰어찼다.
2호선 주변에는 젊은 사람이 놀 수 있는 곳이 널려 있다. 신촌·홍대앞·신림·강남·신천은 서울의 대표적인 젊은이의 거리로 꼽히는 곳이다. 신촌의 홍익문고·현대백화점, 강남역의 뉴욕제과·타워레코드는 젊은 사람들의 약속 장소로 애용되는 곳이다. 이외에도 젊은 사람들이 자주 가는 대형 극장도 모두 2호선 주변에 있다. 동대문운동장역 프레야 빌딩의 MMC, 강변역 테크노마트의 CGV. 삼성역 코엑스몰의 메가박스 등은 상영관을 여러 개 갖추고 있어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다.
2호선은 회사가 많은 을지로와 벤처 기업들이 몰려 있는 테헤란로도 지나기 때문에 젊은 직장인들도 많이 이용한다. 이처럼 대학생과 젊은 직장인이 많이 타기 때문에 2호선은 광고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은 곳이다. 그래서 IMF 위기 이후에 지하철 광고가 많이 줄었지만 2호선만은 예외였다. 다른 노선보다 광고 단가가 비싼데도 광고 물량이 밀렸다. 국전(지하철 광고대행사) 이기도 과장은 “2호선에 지하철 광고가 밀리는 것은, 전체 지하철 광고 물량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닷컴 광고나 패션 광고의 광고주들이 젊은 사람이 많이 이용하는 2호선을 선호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3호선은 '부자철'
경복궁과 청와대를 끼고 도는 3호선은 일명 ‘부자철’이다. ‘지하철 소모임’이라는 통신 동호회(54쪽 참조)의 시샵을 맡고 있는 이재원씨(22)는 “3호선은 부자 노선이다. 압구정·신사·잠원 등 강남의 노른자위 지역을 지나고, 일산이나 분당 같은 부유한 베드타운과 연결되기 때문이다”라고 3호선의 특징을 설명했다. 3호선이 향하는 일산과 분당은 서민들이 꿈꾸는 안락한 삶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까지 일산에 살았다는 박영하씨(27)는 3호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특성을 분석해 편하게 자리에 앉아서 통학할 수 있었다. “일산 사람 중 나이 든 사람은 대부분 자기 차를 이용한다. 지하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주로 젊은 직장인이나 대학생이다. 나이 든 사람 앞에 서면 대부분 불광역·연신내역·구파발역에서 내리기 때문에 자리에 앉아서 갈 수 있다.”
분당에 사는 이정화씨(22)도 비슷한 방법으로 8호선을 갈아타는 사람들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과 어느 자리가 빌지 맞추는 게임을 하는데, 나이 드신 분을 찍으면 틀림없다”라며 라이프 스타일이 구분된다고 말했다.
무개성이 개성인 4호선
혼잡한 강북과 가장 살기 좋은 도시라는 과천을 잇는 4호선은 다른 노선처럼 그다지 개성이 뚜렷하지 않다. 남대문 재래시장과 패션의 거리 명동을 함께 지나고 어린이들의 놀이터 서울랜드·서울대공원과 어른들의 놀이터 경마장을 동시에 지나는 까닭에 4호선이 독특한 특성을 갖기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러나 4호선의 이러한 무개성이 바로 지하철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하철은 시장 가는 아줌마와 쇼핑 가는 딸이 함께 탈 수 있고, 경마장 가는 아버지와 대공원 가는 아들이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하철은 유일하게 의자가 앞을 향하지 않고 서로 마주보게 놓인 교통 수단이다. 그래서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어우러질 수 있는 곳이다.
버스를 이용하는 사람과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이 나뉘고, 다시 그 버스가 보통과 좌석으로, 택시가 일반과 모범으로 나뉘는 지상의 교통 수단에 비해 지하철은 누구에게나 평등하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같은 칸에 타고 같은 속도로 차별 없이 달린다는 것이 지하철의 매력이다.
11월 말에 6호선이 개통되면 이제 2기 지하철도 완전 개통하게 된다. 그동안 소외되었던 지역에도 평등한 교통 수단인 지하철의 혜택이 고루 돌아가게 된 셈이다. 지하철은 앞으로도 서민들의 든든한 동반자가 되어 그들의 희망 찬 삶을 태우고 힘차게 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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