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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독설/이명박 바로세우기

'국민과의 대화', 이렇게 짜고 쳤었다 (김대중 정부 비사)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8. 9. 4.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가면 편해진다. 
용이 되려고 하다가 이무기가 되는 것이다.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의전'이라는 것이 있다. 
기자회견에서 일정한 '의전' 즉 '짜고 치는 고스톱'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없어서도 안 되지만 넘쳐서도 안 된다. 

'의전'에 따라서 미리 예정된 것으로 할 건 하고...
그리고 궁금한 국민들을 대신해 질문하는 기자들 질문을... 
최소한 몇 개는 받아줘야 하지 않을까???

빤히 '짜고 치는 고스톱'인데...
진심이 돋보이고 국정에 대한 깊은 고민이 보인다고 떠벌리면...
그건 참 난감한 일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의 일이다.


“대통령님께서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딱 세 가지만 가져가실 수 있다면 무엇 무엇을 가져가시겠습니까?”
1999년 2월21일, 제3차 국민과의 대화 도중 방청석에서 한 여대생이 일어나 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김대중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실업 문제와 부정부패, 지역 감정 이 세 가지를 송두리째 가져가 버리면 우리 국민들이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치 문답처럼 보이는 이 질문과 대답은 사전에 미리 계획된 ‘준비된 대화’였다.
제3차 국민과의 대화를 주관한 서울방송이 맡은 역할은 질문은 던질 적절한 사람을 물색해 배역을 정하는 것 뿐이었다.
이 질문과 대답은 미리 청와대가 준비한 것이었다.


'재치 문답'식 질문과 답변 설정에는 외부 기관이 관여했다. 
아이디어의 출처는 대통령비서실과 외주 홍보대행 계약을 맺고 있는 한 광고대행사였다.
이 광고대행사는 청와대측과 1999년부터 1년 단위 외주 계약을 맺고 홍보 관련 기획을 맡고 있었다.
청와대는 이곳 외에 다른 광고기획사와도 외주 계약을 맺고 대통령 홍보를 맡기고 있었다.


두 광고대행사가 담당하고 있는 업무는 PI(president identity;대통령 이미지 관리)였다.
청와대가 대통령 홍보를 위해 외부 업체와 계약한 것은 이전 정권에서도 있었던 일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대통령 홍보를 위해 외주 업체를 쓰고 있다.
(백악관 직원의 10% 내외가 공보직이다)


두 광고대행사는 제3차 국민과의 대화에서 ‘대통령의 기지를 엿보게 만드는’ 질문과 대답을 제공했다.
드라마 주인공 아역 배우의 ‘왕따’ 관련 질문과 ‘가장 칭찬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냐’는 한 회사원의 질문도 모두 준비된 것이었다.
‘왕따 문제에 대해서는 어른들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4천5백만 전국민을 칭찬하고 싶고 그 중에서도 신지식인을 특히 칭찬하고 싶다’고 말한 대통령의 대답도 물론 준비된 것이었다.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해서 답변이 A안과 B안으로 나뉘어 준비되었다.
A안은 실제 답변한 것처럼 노골적으로 자나깨나 나라를 생각하는 것처럼 답하는 것이었고
B안은 통상적인 답변 말미에 재치를 더하는 말을 넣는 것이었다.
대부분 A안으로 결정되었다.

(이 실무를 담당했던 행정관은
노무현 정부들어 삼성 구조조정본부에 이사로 취직했고
관련 업무를 관장했던 비서관은 백조로 내내 놀다가
이명박 대통령 대선 캠프에 어렵게 숟가락을 얹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낙하산 가방을 얻지는 못했다.
둘은 청와대 비서관이나 행정관이
게으르고 멍청하고 오만하지만
무지하게 힘이 세다는 것으로 몸으로 보여주었다.)


제4차 '국민과의 대화'를 앞두고
나는 <시사저널>에 '국민과의 대화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러자 청와대는 ‘사실무근’이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리고 모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청와대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증거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 자체가 증거였다.


재치문답 아이디어는 사실 내가 제공한 것이었다.
해당 광고기획사의 청와대 외주홍보 대행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는 국민과의 대화에 쓰일만한 재치문답 아이디어를 제출했고, 이것이 채택되어 실재 방송에서 구현되었던 것이었다.

(내가 냈던 아이디어들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보고 씁쓸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국민과의 대화가 짜고치는 고스톱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어깨가 으쓱하긴 했지만 국민을 기만한 것이어서 마음이 불편했다.
변명하자면, 아이디어를 낼 때 정말 대통령이 그대로 따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후에 내가 낸 아이디어가 몇 가지 더 채택 되었는데,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것들이었다.
오직 국민과의 대화 때 냈던 아이디어만 개운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나쁜 일도 잘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었다.ㅋㅋ)


청와대는 내 존재를 확인하고 항의를 멈췄고,
광고대행사들만 된서리를 맞았다.
(내가 언론사에 입사하지 않았다면 몸담았을 지도 모르는 곳이다.
청와대에서 내 아이디어를 계속 채택하자
광고대행사에서는 아르바이트비를 10만원이나 올려주는 성은을 베풀기도 했었다.)


김대중 정부는 1차와 3차 국민과의 대화는 이런 식으로 각본대로 진행했고
2차와 4차 국민과의 대화는 사전 각본 없이 진행했다.
어느 것이 효과적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어느 것이 바람직한지는 명확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솔직한 대화를 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