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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독설/독설닷컴 칼럼

성재기의 투신과 안도현의 투시는 다르지 않다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3. 7. 30.







어제 경향신문 기사의 일부다. 


“문인 200여명이 최근 절필을 선언한 시인 안도현씨(52·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의 선택을 지지하고 국정원의 국기문란 행위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안도현씨는 지난달 4일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인 나라에서는 시를 단 한 편도 쓰지 않고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문인들은 29일 '절필이 강요되는 시대, 우리는 함께 싸운다'는 제목의 성명에서 "안도현 시인의 결단은 단지 한 시인의 절필 사건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펜을 놓는 선언적 행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심각한 이상 징후를 경고했다"며 "국가권력의 횡포로 우리 대한민국의 문인들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이 침체되거나 위기를 맞게 된다면 우리는 또 다른 안도현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기사의 제목은 <박범신·도종환 등 문인 217명 "절필 안도현 지지">였다. 

이 성명의 로직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안도현은 박근혜가 대통령이니까 시를 쓰지 않겠다고 하고, 

다른 문인들은 그런 안도현을 탄압하면 자신들도 절필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후원금 1억원이 안 모이면 한강에 투신하겠다'는 말이나 '박근혜가 대통령이니까 시를 안 쓰겠다'는 말은... 다르면서 같고, 같으면서 다른 말이라고 본다.

단도직입으로 표현하면, 성재기의 투신과 안도현의 투시(시를 던진 것)의 로직은 다르지 않다.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기 위해 자신의 신체와 재능을 볼모로 잡은 것이다. 


물론 둘의 맥락은 매우 다르다.

하지만 성재기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과 안도현이라는 이름이 갖는 무게감이 다르다. 

그래서 둘은 같다. 

성재기는 성재기 같은 모습만 보여도 되지만, 안도현은 안도현다움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 


안도현의 로직은 박근혜가 대통령이 된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51.6% 국민의 선택을 부정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전제라고 본다. 

이것이 성립하려면 ‘나는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를 인정할 수 없으니까’라고 하거나 

‘박근혜 정부가 내가 트윗에 올린 글을 문제 삼고 수사하니까’라고 구체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전술적으로도 '절필 카드'는 지금 함부로 남발할 카드가 아니다


대통령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48%의 국민과 소통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반대편 지지자들도 대통령을 지지한 51.6%와 소통해야 한다. 

그들의 선택을 부정하는 것은 소통의 전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박근혜정부를 부정하려면 그들의 구체적 통치 행위에서 부정할 이유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상식 아닌가? 


브레히트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했을 때...

그 시대에 대한 깊은 고뇌가 있었다. 

그 시대는 나치의 시대였다. 

그런데 선거 한 번 졌다고 시를 내려 놓는다... 너무 가볍지 않나? 

분노만 있고 정의는 없는 시대인가?


안도현의 트윗 글에 대한 검찰 수사는 분명 오버다. 

그러나 그 수사에 대한 이런 대응도 마찬가지로 오버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내상 후 스트레스 장애(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빗댄 표현)'라고 생각한다.


잠깐 안도현과 송경동의 상황에 대해서 비교하겠다. 

안도현은 대선에 문재인 멘토로 참여한 정치참여 시인이다. 

송경동은 희망버스를 조직한 사회참여 시인이다. 

안도현은 문재인 당선이라는 상대적 가치를 위해 참여한 시인이고 송경동은 노동권 보호라는 절대적 가치를 위해 참여한 시인이다. 


지금 안도현의 상황은 정치참여 시인이 자신의 정치적 표현에 대해서 과도하게 수사 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건 희화화의 대상이다. 

탄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어이없는 수사다. 그냥 웃고 말일이다. 


송경동은 당시 구속된 상황이었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다 인신이 구속된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그러면 이에 맞춰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이때는 송경동이 시를 쓰지 않겠다고 한다거나, 

동료 문인들이 그를 석방할 때까지 절필하겠다고 하면 말이 된다.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시인은 시로 말한다. 

헤밍웨이는 <무기여 잘있거라>로 말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로 말했다. 

시인이 시를 버린다는 것은 바로 무기를 버린다는 것이다. 

안도현은 엉터리 수사에 그냥 투항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 못내 아쉽다.


주제에서 조금 벗어나는 얘기일 수 있지만...

지난 대선 때 많은 지식인들이 투표 참여를 독려하면서 문재인 당선을 위해 애썼다. 

그런 정치참여는 권장할만한 일이었다. 

그들 덕분에 광장의 말은 풍성했다. 


그런데 선거가 끝나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패배하자 이들은 모두 동굴로 들어가 버렸다. 

광장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자신들을 따라서 거기까지 왔던 시민들을 외면하고 자신만의 동굴에 은거했다. 

‘집단 멘붕’의 중요한 축은 바로 그런 ‘패배 리더십’의 부재였다. 

패배에 대한 매뉴얼을 가진 지식인이 없었다. 


광장에 나와서 사람들 앞에 설 때는 각오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을 따른 시민들에 대한 무한책임의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때 지식인들의 모습은 실망 그 자체였다. 


그때 ‘지지하지 않았던 지식인들이 보내는 당선 축하와 당부의 글’을 받아보려고 

여러 사람을 접촉해 보았는데 모두 거절했다. 

자기자신을 추스르기도 바쁘다는 것이었다. 

‘아 이 집단멘붕은 쉽게 치유가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가 침몰할 때 선장은 가장 마지막에 배에서 내린다. 

아시아나 항공기가 추락했을 때 객실 승무원은 승객들을 구조하고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그런데 대선 때 맨 앞에서 달렸던 우리 지식인들은 

대선이 끝나자 맨 먼저 사라져버렸다. 


리더였던 그들의 심리적 미성숙을 지켜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시인의 과장은 시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안도현 시인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박근혜 정부 부정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은 분명 무리수다. 


이런 식의 절필 행진이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순한 분노는 세상을 바꾸는 힘으로 부족하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체험하지 않았나?

국민들이, 독자들이 지식인과 문인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깊이 헤아리길 바란다. 

그들의 정신적 성숙과 내면의 깊이를 통해 위무 받고 싶은 독자를 위해 부디 무모한 절필 행진을 하지 마시길... 



제 생각은 이런데... 

다른 의견도 많으실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