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박수칠 때 떠나야 하는 사연
예술가들은 박수칠 때 떠난다. 무대에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박수칠 때 떠난다. 박수칠 때 무대를 떠나는 것은 창작의 고통을 피해서지만 현실에서 박수칠 때 떠나는 것은 현실의 무게에 치여서다. 흔히 ‘예술은 삶을 예술보다 더 흥미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삶을 흥미롭게 바꾼 대가는 가혹하다.
예술가들이 예술의 거리에서 쫓겨나고 있다. 예술가들이 예술의 거리에서 쫓겨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거리를 예술적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거리를 예술적인 거리로 바꾸면,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이 몰리면, 임대료가 높아지고, 결국 그 거리의 주역이었던 예술가들이 내쫓기게 된다.
예술가들의 도시 뉴욕이 이미 겪었던 일이다. 뉴욕 예술의 1번지였던 소호(SoHo)와 그리니치빌리지(Greenwich Village)의 임대료가 높아지자 이스트빌리지(East Village), 로어 이스트(Lower East), 트라이베카(Tribeca)로 옮겼다. 맨하탄을 벗어나 브루클린의 덤보(Dumbo), 부시윅(Bushiwick)과 윌리엄스버그(Williamsburg)에 둥지를 틀기도 했다.
우리도 홍대 앞 예술가들이 똑같은 일을 겪었다. 예술가뿐만 아니라 문화 아지트 역할을 하는 카페도 마찬가지다. 홍대 ‘앞’ 카페문화를 바꾼 이리카페도 임대료 때문에 홍대 ‘옆’ 상수동으로 밀려났다. 존재감이 큰 이리카페가 상수동으로 이전하면서 그 옆으로 다른 카페들도 많이 옮겼다. 새로운 문화거리가 형성되면서 이리카페는 도리어 임대료 압박을 느끼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황야의 이리처럼 떠돌아다니는 이리카페의 사정은 홍대 앞의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최근에 제주도의 대표적인 문화기획자인 이승택 교수(제주대 건축학부)로부터 다급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중섭거리의 문화 거점인 여행자카페 '메이비'가 건물주로부터 건물을 증축할 예정이라며 나가라는 통보를 들었다는 것이다. 서귀포를 방문하는 외국인 여행자들이 꼭 방문하는 명소가 된 ‘메이비’는 바로 그 죄로 추방의 위기에 처했다.
‘이리카페’와 ‘메이비’의 사례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다. 신사동 가로수길을 일군 디자이너들과 조그만 카페 주인들과 소규모 갤러리 주인들은 다 밀려나서 신사동 가로수길이 새로운 서울의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얘기를 기사로나 보는 상황이 되었다. 북촌을 전통문화의 거리로 복원시킨 장인들은 어떤가? 그들 또한 북촌을 활성화시킨 공로로 높은 임대료에 밀려났다. 대학로 소극장 주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높아진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극장 조명을 끄고 있다.
예술가들이 이렇게 기만당하는 동안 건물주들과 부동산 중개인들은 이 기막힌 상권 재개발 방식을 만끽하고 있다. 건물주들이 새 건물을 올리고 부동산 중개인들이 레드카펫을 깔면 대기업 브랜드들이 위풍당당하게 등장해 이 거리의 새로운 주인이 된다. 마치 무슨 공식처럼 반복되는 패턴이다.
비극적인 창조경제다. 문화적 상징가치를 만들어낸 주역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그것을 만드는데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은 건물주와 부동산업자와 대기업이 이익을 독점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관청은 ‘문화의 거리 활성화’라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느는 것에만 환호한다. 외국처럼 임대료 인상률 상한제를 두는 등 예술가나 문화거점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이제 다른 쪽의 풍경을 보자. 광주광역시 양림동에 양림미술관이라는 곳이 새로 들어섰다. 한옥도 양옥도 아닌 것이, 어지중간하게 들어서 있다. 미술관인데 들어가보니 미술관으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사정을 들어보니 예산도 나오고 해서 일단 지어놓고 용도는 나중에 정한 것이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한가한 일도 있나 싶었다.
세계적인 건축가라는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서울시의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는 더 가관이다. 총 5000억여 원을 들여서 만든 건물을 어떻게 사용할 지에 대해서 아직도 고민 중이다. ‘디자인서울’을 주창하며 이 무지막지한 덩어리를 투척해 놓고 이를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서는 디자인이 안 되었던 것이다. 오세훈 전 시장이 넘겨준 이 골치 아픈 숙제에 박원순 시장은 아직까지 시원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양림미술관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뿐일까? 공간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민하는 사람과 사용할 공간이 없어 발을 동동 굴리는 사람들 사이의 부조화는 어디서든 볼 수 있는 모습이다. 둘 다 절실하면 연결이 되겠지만 한 쪽은 절실한데 한 쪽은 그렇지 않아 이 둘은 잘 연결되지 않는다. 서울문화재단의 숙제다.
공간과 예술만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술과 시민은 더욱 멀리 분리되어 있다. 예술은 시민을 찾아와주지 않는다. 간혹 찾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찾아가는 예술은 스스로를 낮게 생각해 예술적 성취를 욕심내지 않는다. 찾아가는 예술의 수준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찾아간다’는 사실만 강조한다.
스티브 잡스가 위대한 것은 앱스토어나 아이튠스라는 어플리케이션과 콘텐츠의 거대한 플랫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거대한 소우주를 통해 아이디어가 풍부한 개발자와 아이디어를 좇는 이용자가 만난다. 하나의 생태계가 구축된 것이다. 그리고 이 생태계 안에서는 누구나 똑같은 규정의 적용을 받는다. 그래서 개발자와 이용자가 모두 행복하다. 우리의 문화예술계에도 이런 공정한 생태계가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은 새로운 승자를 만들어낸다. 유튜브라는 네트워크가 있었기 때문에 ‘강남스타일’의 싸이가 글로벌 스타가 될 수 있었다. 우리 문화예술계에는 앱스토어나 아이튠스나 유튜브와 같은 공정한 플랫폼이 필요하다. 서울문화재단과 같은 곳에서 이 플랫폼 역할을 한 번 욕심내 볼만하지 않을까? 예술과 시민을 연결하는, 그 오래된 숙제에 대한 답을 서울문화재단이 내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어플리케이션은 어떨까? 걸어서 10분 안에(반경 1km) 갈 수 있는 문화 시설이나 문화 행사, 문화재가 모두 표시되어 그 어플을 작동시키면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문화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지방이라면 차로 10분 안에(반경 10km 이내) 갈 수 있는 곳이 표시된다. 이런 위치기반 문화 안내 어플이 있다면 시민들의 문화생활이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관의 감각적인 문화행정은 때로 비약적인 문화예술적 성취를 가져오기도 한다. 프랑스의 경우 좌파정권이 고급예술을 지원하는 사업을 줄이고 대중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야외 공연 지원 예산을 늘려 야외극 발전을 견인했다. 그래서 세계 야외극 축제에서 프랑스 공연팀이 가장 많이 초청받도록 만들었다. 늘 신명이 날 준비가 되어 있는 예술가들을 어떻게 자극시켜줄 지를 아는 것이다.
다시 예술가와 부동산의 역설 문제를 들여다보자. 아직 명쾌한 답은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제 해결은 문제 인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이다. 관은 예술가들의 이런 딜레마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원 정책을 세울 때 기승전결을 담아야 한다. 선거에 나올 정치인처럼 단기간의 성과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 거리를 활성화 시킨 대가가 추방이 아니라 예술적 성취가 된다 확신이 있을 때 예술가들도 신명을 다할 것이다.
주) 문화+서울(10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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