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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키 작은 영화들

명량을 흥행을 즐기는 보수, 명량 흥행이 불편한 진보...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4. 12. 28.





<명량>을 즐기는 보수, <명량>이 불편한 진보...

<명량> 신드롬을 보면 보수가 왜 이기는지, 진보가 왜 지는지가 보인다


<명량>의 흥행에는 사회적 분위기도 영향을 끼쳤다.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가 시스템의 문제가 부각되어 국난 극복의 리더십을 찾게 되었고 연 이은 선거에서 야권이 패배하면서 메시아적 영웅을 원하는 대중심리가 커져서 영화의 흥행을 이끌었다는 분석이 주로 나온다. 그런데 진보성향이냐 보수성향이냐에 따라 <명량>에 대한 반응이나 이순신 신드롬에 대한 감수성이 다르다. 박근혜정부와 보수성향 정치인들은 <명량>의 흥행을 즐기며 이순신 리더십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고 있다. 반면 박근혜 정부에 반감을 가진 국민들과 진보성향 오피니언리더들은 <명량>의 흥행을 불편해하며 이순신 신드롬에 자중지란을 겪고 있다. 


사실 영화의 내용과 흥행 맥락으로만 보면 <명량>은 ‘현재 권력자’ 쪽에서 불편해야 할 영화다. 영화에서 이순신의 아들 이회는 “아버님은 왜 싸우시는 겁니까?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아버님의 목숨까지 취하려고 했던 상감입니다”라고 말한다. 백전승장인 이순신을 사지로 몰아넣어 패전을 자초했던 당대 권력의 무능과 불공정을 비판한 대목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시점에서 <명량>을 보는 관객이라면 십중팔구 ‘무능한 권력’으로 박근혜 정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명량>의 흥행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측은 정부·여당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 성향 정치인들은 연이어 ‘<명량> 관람 이벤트’를 연출하며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복제하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8월6일 <명량>을 관람한 뒤 다음과 같은 소감을 대변인을 통해 전했다. “국가가 위기를 맞았을 때 민·관·군이 합동해 위기를 극복하고 국론을 결집했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 활성화와 국가 혁신을 한마음으로 추진하자는 의미가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침체의 늪에 빠진 한국 사회를 다시 일으키는 리더십을 보이겠다.”


이순신 장군처럼 지금의 위기 국면을 극복하겠다는 의미다. 박 대통령은 당대 권력인 왕(선조)보다 이순신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의 <명량> 관람은 나름 절박한 정치 행위다. 세월호 참사로 땅에 떨어진 정권의 권위를 경제 활성화로 만회하고 현 국면을 돌파하려면 스스로를 ‘국난 극복 리더십’으로 상징화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은 8월13일 전군지휘관회의에서도 “전장에 나선 이순신 장군이 맨 앞에 서서 부하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듯이 여러분도 그런 지휘관이 되어달라”며 또다시 이순신 장군을 호출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8월13일 당 출입기자들과 함께 <명량>을 본 뒤 감상평을 남겼다. “역사를 보면 결국은 이기는 사람이 지도자이고, 지도자는 이겨야 한다는 걸 느꼈다. (영화가) 사즉생의 정신으로 매사에 온몸을 던져서 목숨 걸고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교훈을 줬다.” ‘이기고 봐야 한다’는 그의 세계관이 이순신 장군의 그것과 비슷한지는 불명확하지만, 지난 대선 직전 ‘NLL 녹취록 낭송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반면 이 같은 이순신에 대한 정치적 상징화 작업이 백척간두의 위기를 겪고 있는 야권에서는 오히려 드물다. 야권 정치인 중에서는,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8월4일 의원총회에서 이순신을 거론했다. “촛불 밝히고 혼자 앉아 나랏일 생각에 이르니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다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심정도…, 모두 우리가 이겨내야 할 시련의 시간과 맞닿아 있다.” 이 밖에는 야권의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정치인 중 <명량>과 관련된 이벤트를 벌인 경우는 없다(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영화 <광해>를 관람한 뒤 “인간적인 왕의 모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을 봤다”라고 발언한 바 있다).


심지어 야권(혹은 진보)의 지지 기반을 이루고 있는 비판적 문화평론가들 중에서는 <명량>의 흥행을 내심 불편해하는 이들도 눈에 띈다. 박근혜 대통령이 <명량>을 관람했던 8월6일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트위터에 “영화 <명량>은 솔직히 졸작이죠. 흥행은 영화의 인기라기보다 이순신 장군의 인기로 해석해야 할 듯…. <활>은 참 괜찮았는데”라는 글을 올렸다. 진 교수의 <명량> 혹평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애국주의 마케팅에 의지한 ‘국뽕영화(애국주의로 마취시키는 영화)’라는 비난도 나왔다. SNS에 올려진 <명량>에 대한 비난을 보면 한국 사회에 ‘애국주의 포비아(애국주의에 대한 공포증)’가 심각하게 형성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순신 신드롬이 파시즘으로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닥치고 애국’이라며, 아무 데나 애국을 갖다 붙이는 세력들에 대한 경계심이 <명량>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졌다. <명량>에 대한 평을 거부하던 한 진보 지식인은 그 이유로 “애국주의를 위해 사실을 왜곡했다”라고 말했다. 영화 <명량>에 나오는 ‘사실 왜곡’으로는, 해전 직전에 급하게 건조했으나 불타버린 거북선, 배설의 이순신 암살 시도, 대장선에서 벌어진 육박전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명량>은 이순신 관련 극화 중에서 그나마 역사적 기록에 가깝게 해전 장면을 복원했다는 평가도 있다.


보수 진영에서는 진보 진영의 ‘애국주의 포비아’를 비꼬기도 한다. <동아일보> 송평인 논설위원이 쓴 ‘진중권의 영화 <명량> 시비’라는 칼럼(8월10일자)이 대표 사례다. “진중권의 비판에는 오히려 그의 비꼬인 심리가 엿보인다. <디워(The War)> 비판은 한국 사람이 만든 것이니까 무조건 다 칭찬해주고 본다는 식의 맹목적 애국심(쇼비니즘)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됐다. 그가 <명량>에 괜한 시비를 붙인 데서도 영화가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대한 적개심 같은 것이 느껴진다. 모든 애국심이 쇼비니즘은 아니다. 진중권의 시비는 한 번도 건전한 애국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 특유의 심리상태의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명량>에 대한 문제제기를 이순신에 대한 문제제기로 오독한 칼럼이지만 이런 식으로 틈새를 벌리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칼럼이라 인용했다)


<명량>은 단순히 혹평을 듣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크린 독점을 통해 영화 배급구조를 왜곡시키는 원흉으로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명량>이 좀 억울한 대목이 있다. <명량>이 개봉되기 한 달 전에 개봉한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와 1주일 전에 개봉한 <군도: 민란의 시대>와 개봉 스크린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명량> 못지않게 혹은 <명량> 이상으로 스크린 독점이 심했지만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거의 없었다. 6월25일 개봉한 <트랜스포머: 사라진 시대>는 1512개 스크린에서 개봉해 최다 스크린이 1602개에 달했으면서도 관객은 529만 명에 그쳤다. <군도: 민란의 시대>는 7월23일 1250개 스크린에서 개봉해 최다 스크린이 1394개에 달했으나 관객은 500만 명이 들지 않았다. 반면 7월30일 1159개 스크린에서 개봉한 <명량>은 최다스크린이 1586개에 달했는데 12일 만에 관객 1천만 명을 달성했다. 스크린 독점에 대한 문제제기는 한국영화인 <명량> 개봉 때보다 외화인 <트랜스포커: 사라진 시대>의 개봉 때 제기되었다면 가장 반향이 컸을 것이다. 


<명량>을 둘러싼 호오(好惡)가 정치적 성향에 따라 대조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 측은 <명량>의 메시지를 아전인수 격으로 끌고 와서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고 있다. <명량>에 대한 진보 측의 시비에는 따끔하게 훈계하며 애국심을 강조한다. 진보 측은 <명량>의 흥행은 애국주의 마케팅과 스크린 독점 때문이라고 폄훼한다. 마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쟁에 휘둘렸던 이순신 장군처럼 <명량>도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도마 위에서 재단되고 있다. 


보수와 진보의 평가가 갈린다는 것은 포털 사이트 관객 평점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진보 성향 누리꾼이 더 많이 이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다음에서는 평점 평균이 7.9를 기록한 데 비해, 네이버의 평점 평균은 8.6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룬 영화 <변호인>의 경우 다음의 평점 평균은 9.6으로 네이버 평점 평균 8.9보다 높았다(8월15일 현재). 영화 전문 주간지 <씨네21>에 나온 평론가들의 별점이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군도:민란의 시대>는 주로 세 개 반에서 네 개의 별점을 받은 데 비해 <명량>은 주로 두 개 반에서 세 개를 받았다.





그렇다면 <명량>은 과연 ‘애국팔이’를 하고 있을까? 혹은 <명량>에서 드러나는 애국주의는 시민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이며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것일까? 여기서 <명량>의 영화 속 대사를 들여다보자. ‘자신을 해하려는 임금을 위해 왜 싸우느냐’는 아들의 질문에 이순신은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쫓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고 나라가 있어야 임금이 있는 법이지”라고 답한다. ‘백성(민중)’을 기반으로 ‘임금(권력)’이 존재한다는,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가 조선시대 인물인 이순신의 입에서 나온다.


영화 속 이순신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해 있다. 영화의 배경은 이순신이 권력의 살해 위협에서 겨우 빠져나온 시기다. 이순신은 권력자가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자다. 더욱이 이순신을 둘러싸고 위협하는 것은 왜군에 그치지 않는다. 수군을 버리라는 왕, 전투를 두려워하는 장수, 탈영하려는 병사 등이 사면에서 이순신을 압박한다. 이처럼 소외된 이순신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는 주체는 정탐꾼, 물길에 밝은 늙은 어부, 그리고 아버지를 잃은 소년 격군 등 평범하거나 불행한 민중들로 묘사된다. 이런 시놉시스와 인물들로부터 억압적 애국주의를 읽어내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국가라는 것이 가끔 혹은 상당한 기간 ‘폭압자’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사실이지만, 국가 이외에 민중의 이익을 대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따로 가능할까?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말은 야권과 진보 진영이 늘 입에 달고 다니던 테제다.


주목할 것은 <명량> 흥행의 원동력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는 것이다. <명량>은 드물게 40대 예매율이 20~30대를 능가했던 영화다. 기성세대로부터 큰 지지를 얻은 영화라는 것이다. <명량>은 영화 관람을 전혀 하지 않았던 관객까지 극장에 끌어들였다. “시부모님이 <명량>을 보러 35년 만에 극장에 가셨다”라고 말하는 후배의 말을 듣고 <명량>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성세대의 이런 감수성을 받아들일 코드가 진보진영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명량>을 통해 민심을 끌어들일만한 프레임이 없었다. 


<명량>을 둘러싼 상황은 확실히 대비된다. 보수 정치인들은 <명량>의 메시지를 아전인수 격으로 끌고 와서 자신들의 이미지 메이킹에 활용하고 <명량>에 대한 시비에도 따끔하게 훈수하면서 애국심을 강조했다. 이에 반해 진보 세력은 <명량>의 흥행은 스크린 독점 때문이고 영화는 애국주의에 기댄 마케팅 덕분이라고 폄훼하는 형국이었다. 마치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정쟁에 휘둘렸던 이순신 장군처럼 <명량>도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희생양이 되었다. 


영화계에서는 <명량>이 관객 1700만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거대한 사회적 현상이고 열광이다. 이를 수용하는 방식을 보면 그들의 정치력이 오롯이 드러난다.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두고 이순신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기 위해서 끝없이 궁리한다. 그는 “두려움은 적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고 나타난다. 저들도 6년 동안 나에게 줄곧 져온 두려움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그 용기는 백 배 천 배 배가 되어 나타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상황을 반전시키는 그의 지략은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한 무기력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힌트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