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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판 위원회/키 작은 영화들

내 돈 주고 보여주고 싶은 영화 세 편, <자백>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죽여주는 여자>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6. 10. 13.



<자백>

 

그동안 다큐멘터리영화가 저널리즘의 한 축을 담당했는데, 시대의 단면과 사회의 모순을 담아내며, 자백은 저널리즘이 어떻게 다큐멘터리로 진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작품. 저널리즘은 '카더라'를 전파하는 곳이 아니다. '카더라'를 확인하는 곳이다. 자백은 그 지난한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탄광으로 비유하면 이렇다. 자백은 탄광 앞에서 이 탄광에서 학살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라고 끝내지 않는다. 자백은 탄광 안에 들어가 땅굴 하나하나를 들여다 본다. 그래서 탄광에 대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문을 풀어준다. 유골이 나오지 않아도 흔적을 가져가 실종자와 DNA가 일치하는지 확인한다.

 

저널리즘적으로 보았을 때, 자백은 마이클 무어의 다큐들보다 훨씬 우월하다. 마이클 무어는 검증하지 않는다. 다만 주류언론의 논리에 대한 반론권을 세운다는 명분으로 반대의 이야기를 침소봉대한다. 하지만 자백은 다르다. 거품이 없다.

 

진실에 이르는 길은 험난하다. 하지만 그 과정을 따라가는 것은 짜릿짜릿하다. 관객과 함께 거짓의 베일을 하나하나 벗겨간다. 그래서 나는 자백에 대해서 말할 때 '재미있는 영화'라고 말한다. 재미있다는 말에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자백이 거기에 하나를 더했다. 진실을 밝혀가는 짜릿함.

 

자백의 개봉이 국정원의 자백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우리가 간첩 조작을 했다'는 자백 말이다.

 




<미스 페레그린과 이상한 아이들의 집>

 

팀 버튼의 영화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조합이다.

톱니바퀴로 맞물려 이 세계와 저 세계가 상호 연관성을 갖고 이 세계의 동력이 저 세계의 동력으로 전달된다.

 

이번에도 팀 버튼의 톱니바퀴는 멋진 조합을 만들어냈다. 현실계는 현실계의 논리로, 상상계는 상상계의 논리로, 괴물들은 괴물들의 논리로 각자의 시간을 사는데, 이들의 논리고 서로 맞물며 얽히고 설킨다.

 

이 촘촘함 구성력은 밖으로는 상상력으로 확장되고 안으로는 다양한 은유와 환유로 진동한다. 그 안에서 또한 인간은 각자의 고민 안으로 파고든다. 이 역시 천의무봉의 톱니바퀴다.

 

흔히 팀 버튼 영화를 '현대의 우화'라고 하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이상한 아이들의 집'을 지체장애인 정신장애인 고아들이 사는 시설로 바꿔 생각해보면, 섬뜩해진다. 이 아이들을 집어삼키려는 괴물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런 시설이 폭격 맞아 무너졌다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무섭다.

 

암튼 팀 버튼은 팀 버튼이다. 그의 영화 앞에서 공포영화는 허무해 지고, 판타지영화는 단순해지며, 모험 영화는 유치해진다. 영화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낼 줄 아는 감독이다.





<죽여주는 여자>

 

<죽여주는 여자>는 ‘영화적 조합’ 때문에 기대가 되었다. <고산자>의 경우, 왜 강우석 감독이 이런 영화를? 왜 차승원이 김정호 선생을? 의문이 들게 했지만 <죽여주는 여자>의 윤여정과 이재용의 조합은 기대를 품게 했다. 윤여정을 받아낼 그릇으로, 이재용의 의도를 구현해줄 배우로, 그 이상의 조합은 없을 것 같았다. 둘은 이미 <여배우들>에서 합을 맞춘 적이 있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묘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창동이 시를 썼고, 이재용이 또 한 편의 시를 썼다’라고. 이창동 감독의 <시>를 보며, 주인공의 섬세한 감성을 따라갔던 관객이라면 <죽여주는 영화>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늙은, 몸을 파는, 성병에 걸린, 늘 문제를 만드는 여인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말이다. 윤여정의 ‘인생영화’라 할 만하다.

 

영화를 보는 동안 <커피 한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 등 성매매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영화들이 떠올랐다. 감독은 성매매 여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묘사했고, 배우는 성매매 여성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풀어냈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이해받게 만들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영화감독은 때로 사회부 기자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이 영화에서 이재용 감독이 그렇다. 윤여정은 리포터가 되어 그 문제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한다.

 

낮은 자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측면에서 소영(윤여정 분)은 일본 동북지방의 무당을 연상시킨다. 일본 동북지방에서는 사회적 약자인 여자가, 그 중에 성적 매력이 없는 늙은 여자가, 그 중에 장애인인 눈이 먼 여성들이 무당을 한다. 그들의 품으로 끌어안지 못할 약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사회통합 기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영도 그렇다. 늙은 구원의 여신마냥 세상이 버린 약자들을 품는다. 아동 복지, 장애인 복지, 성소수자 복지, 노인 복지, 다 그녀의 몫이다. 어찌 보면 그녀는 박근혜 대통령의 대척점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모든 문제의 최종 책임자면서 철저하게 외면하는 대통령과 달리 그녀는 제 코가 석자인데 이들을 거둔다.

 

그녀는 실패한 가부장제의 마지막 지지대가 된다. 그녀를 중심으로 유사가족이 꾸려지고 모두들 그녀에게 기생한다. 남자들은 참 염치가 없다. 마지막 궂은일까지 그녀에게 부탁한다. 소영의 비루한 말년을 그리고 있지만 그래서 남자들의 비루한 말년도 보인다. 끝없이 이해해주는 존재에 기댄 끝없이 이해받고 싶어하는 존재가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죽여주는 영화>는 참 죽여주는 제목인 것 같다. 그 이유는 보시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