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남은 돌아왔고
노순동은 떠났고
안은주는 쉰다.
나는
이 세 여기자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으로 보는
'시사저널 사태'
그리고
<시사IN> 창간 1주년
김은남 누님 |
노순동 누님 |
안은주 누님 |
'시사저널 사태'를 겪기 전까지
김은남과 노순동과 안은주는 그냥 선배였다.
'시사저널 사태'를 겪고 그들은 '누님'이 되었다.
<시사IN> 창간 1주년을 되돌아보면서 사진을 정리하는데,
유독 이들 '세 누님'의 사진이 눈에 많이 띄였다.
(다른 누님들이 삐질라....흠...)
그래서 '시사저널 사태'와 '시사저널 파업'
그리고 '시사IN 창간'을 이들의 사진으로 재구성 해보았다.
- 김은남-
김은남 선배는 노조 사무국장을 맡아 고생을 많이 했다.
빤한 노조 살림을 요모조모 요령 있게 잘 꾸렸다.
창간을 마치고 김은남 선배는 남편과 함께 미국 연수를 갔다가 최근 컴백했다.
이제 지면을 통해 그녀의 기사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파업 막바지에
노조 사무국장이었던 김은남 선배는
정희상 선배와 함께 심상기 집 앞에서 단식 농성을 벌였다.
나는 반대했다.
그런다고 말귀를 알아들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은 단식을 강행했다.
그들과 함께 북아현동 고개에서 여름을 보냈다.
어린 두 아들이 왔다 갈 때마다 김은남은 약해졌다.
그리고 더 강해졌다.
- 노순동 -
'시사저널 사태' 초기에
윤무영 선배와 함께 노순동 선배는 '3개월 정직'의 징계를 받았다.
나중에 내가 '무기정직' 징계를 받았을 때 그 징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집에서나 회사에서나 '소녀가장' 노릇을 충실히 했던 노순동 선배는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다.
그녀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해 본다.
파업 기간 동안 노순동 선배는 성명서와 노보를 도맡았다.
파업 기간 중에도 그녀는 글에 찌들어 지냈다.
그녀의 능력이 진짜 빛을 발할 때는
용산에 노조 사무실을 만들 때다.
그녀는 정말 신나게 노조 사무실을 꾸몄다.
시사저널 파업 기간 동안
많은 독자분들이 도와주셨다.
그 와중에 그들은 시사저널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독자를 고소하는 언론사...기가 찼다.
- 안은주-
상장을 받는 게 아니다.
지방노동청에 파업 쟁의 신고를 하는 것이다.
표정 참 밝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 줄도 모르고...ㅋㅋ
'시사저널 파업' 기간 동안 길거리집회를 많이 했다.
우리에게는 촛불이 무척 익숙했다.
촛불집회 때 <시사IN> 기자들이 거리편집국을 차린 것은 필연이었다.
나쁜 짓 하는 놈들은 꼭 '법과 원칙'을 내세운다.
'법과 원칙' 때문에 파업 전후로 갖은 소송에 시달렸다.
다행히 다 이겼다.
안은주 선배는 휴직 신청을 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그녀는 또 씩씩한 모습으로 독자 앞에 나타날 것이다.
시사저널 사태 2년...
인쇄소에 넘어간 기사를
사장이 편집국 몰래 빼면서 시작된 '시사저널 사태',
우리는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처음엔 금방 끝날 줄 알았다.
그러나...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다시 여름이 오고...
그래도 우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남들보다 1년 먼저 촛불집회도 해보고...
고생도 많이 했지만....
(거리 편집국 시절)
파업 전후로 많은 상을 받았다.
안종필 자유언론상
한국기자상 공로상
민주언론상
하지만, 상이 우리의 허기까지 달래주지는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완주했다.
그리고 <시사IN>을 창간했다.
그리고 1년을 버텼다.
앞으로 10년을
100년을
더 버텨야 한다.
그 여정에 함께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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