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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 살벌한 독설

전두환과 이순자 그리고 김대중과 이희호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19. 6. 11.

옛그림 중 허주 이징이 그린 <백응박압도>를 좋아한다. 새를 사냥해 발로 누르고 있는 흰 매를 그린 그림이다. 지배와 피지배를 형상화 한 듯해서 이 그림을 보면 복잡한 생각이 든다. 그림처럼 피해자는 구차스럽고 가해자는 늠름하다. 이징이 왕족 출신의 화가라는 점과 그림의 구도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부와 명예(인기)와 권력은 부산물처럼 '폭력적 억압'을 초래한다. ‘내가 내 돈을 이만큼 쓰는데 내가 이 정도도 못해’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데 그럼 나 하고 싶은 대로 할래’ ‘내가 만든 판인데 내 맘대로 할래’하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은연중에 보여주고 사람들은 마지못해 그들을 배려하곤 한다. 논란이 되고 있는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자서전은 현대의 <백응박압도>다.

 

전두환 씨는 『전두환 회고록』(자작나무숲)에서 자신을 “5·18의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 됐다”라고 표현했다. 이순자씨는 이보다 앞서 펴낸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우리 내외도 사실 5·18 사태의 억울한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황당하지만 사실 예측 가능했던 논리다. 세상 일이 아이러니 한 것이, 피해자는 자신들이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잘 모르지만, 가해자는 왜 자신이 그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자기 논리를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속마음으로나 가질 것이니 남들에게 펼칠만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인 이 부부는 이를 드러내고 결국 매를 벌었다.

 

인도네시아 대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을 보면 가해자의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피해자들이 마지막 순간 죽음의 공포에서 발버둥친 것을 ‘구차스러웠다’고 묘사하고 때려죽이지 않고 줄로 목을 매 죽인 것을 ‘배려’라고 자랑했다. 피해자들이 피해를 숨길 때 그들은 가해를 자랑했다.

 

이순자씨는 자서전에서 “우리는 김대중정부 때가 가장 행복했다. 매번 청와대에 불러 주고. 지금도 이희호 여사가 명절 때마다 선물을 보내 주신다”라고 기록했다. 저 대목을 읽으면서 사무쳤다. ‘전라도 사람은 안 된다’는 편견을 바꿔 보려고 김대중, 이희호 부부는 저들을 끝까지 인간 대접 해주며 구도의 길을 걸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희호 여사의 회고록을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구명을 위해 전두환을 찾아갔던 대목이 나온다. 그때 청와대 경호실 직원들은 이 여사에게 각하와 악수할 때 각하의 손이 아플 수 있으니 반지를 빼라고 요구해서 뺐다고 기록한 내용이 나온다. 그런 그들에게 이 여사는 끝까지 인간의 도를 다하고 있다.

 

전두환 이순자 부부의 자서전은 비난 받아 마땅한 내용이지만 또한 필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차라리 그들이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 준 것이 고맙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한 발짝 더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최고의 응징은 기록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응징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