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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논객 열전

'100분 토론', 100분 동안의 마법이 가능한 이유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2. 17.


토론프로그램 사회자를 보면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관심 없는 문제의 디테일에
그 정도 관심을 쏟을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손석희 교수가 존경스러운 이유는
디테일 싸움으로 잘 몰고가기 때문이다.

내가 관심 있는 문제라면 몰라도
그 많은 문제들에 그런 섬세한 관심은
도저히 쏟을 용기가 없다.
'백토' 400회를 기리는 글을 한 편 썼었는데,
블로그에도 공개한다.




지난 2008년 12월 18일, MBC <100분 토론>이 ‘4만 시간 무사고 방송’을 기념하는 4백회 특집 방송을 했다. 시사교양 프로그램계의 ‘무한도전’ <100분 토론>은 토론계의 ‘무릎팍 도사’ 손석희 교수의 사회로 4만 시간 동안 순항할 수 있었다. ‘TV 토론은 <100분 토론>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말할 정도로 대한민국 토론문화 개선에 기여한 바가 크다. 



요즘 <100분 토론>은 한껏 물이 올라 있다. 갓 잡아 올린 싱싱한 횟감처럼 퍼덕퍼덕하다. 이 정도 자리를 잡기까지는 토론자들의 역할이 컸다. 좌우를 불문한 스타 토론자들이 <100분 토론>을 키웠다. 그러나 이제는 반대다. <100분 토론>이 출연자를 키운다. 마치 연예인들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하고 싶어 안달하듯이 오피니언 리더들도 <100분 토론>에 출연하고 싶어 한다.


출연하면 한 방 터뜨려 줘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력도 받는다. 이는 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의 생리와도 비슷하다. 연예인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들의 배꼽을 빼놓을 에피소드를 들려주려고 안달하듯이 <100분 토론> 참가자들도 뭔가 한 건 터뜨려 줘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받는다. 그러다 보면 무리한 주장이 나오고, 욕을 먹고, 안티가 생기기도 한다.


그래도 나온다. 그리고 또 욕을 먹는다. ‘나가서 욕을 먹더라도 남는 장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대편에서 욕을 많이 먹는다는 것은 이편에서 칭찬 들을 여지도 커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00분 토론>에서 한 방 터뜨리면, 비록 욕을 먹더라도 자신과 같은 입장을 가진 세력 안에서는 대표성을 갖게 된다.


토론 출연자들에게는 오히려 욕이 반갑다. 욕이 선명해지는 만큼 자신의 존재도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욕테크’를 잘해서 국회의원이 된 사람도 있다. 오피니언 리더 중에는 <100분 토론>에 출연시켜 주지 않는다며 제작진을 고소한 사람도 있다. ‘내가 이 분야의 대표선수인데 왜 나를 부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숱한 화제를 낳았지만 정작 <100분 토론>의 시청률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의미를 갖는 것은 뉴스를 생산해 주기 때문이다. <100분 토론>은 기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프로그램이다. 주요 취재원이 출연하기 때문이다. 기자들은 이들의 말을 흘려듣지 않는다. 토론자의 문제 발언은 다음날 바로 기사화된다.


<100분 토론>을 이런 반석 위에 올린 것은 제작진의 숨은 노력도 크지만 사회자 손석희 교수의 공이 크다. 토론 진행자로서 토론 프로그램 지고지순의 가치인 ‘공정성’에 충실하기 때문이다. 그는 ‘공정성의 재단’에 자신의 소신을 헌납했다. 역설적이게도 공정하게 진행하면 양쪽 모두로부터 공정하지 않다는 볼멘소리를 듣게 되지만 시청자들은 <100분 토론>의 공정성에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


손 교수가 갖는 공정성은 세 가지 축으로 형성되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세 축에서 공정성이 구축되었다. 과거의 그는 MBC 파업을 주동하며 언론 자유를 위해 싸웠다. 현재의 그는 공정한 진행을 위해 노력한다. 미래의 그는 정치권에 투신하지 않고 영원히 저널리스트로 남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있다. 이것이 손 교수의 힘이다. 


다음은 ‘디테일 싸움’이 치열하다는 것이다. 언젠가부터 <100분 토론> 참가자와 시청자 사이에는 묵계가 생겼다. 일반론적인 이야기는 금기가 된 것이다. 총론적인 이야기를 하면 방청석에서부터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려면 여기 왜 나왔어?’ 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 미묘한 긴장감이 <100분 토론>의 매력이다.


최악의 토론자는 논점을 뭉뚱그려 버리는 토론자다. “자, 양쪽 모두 선진조국 창조를 위해 노력하자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라고 정리해 버리면 토론자는 황당해진다. 그러면 애초 토론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손 교수는 논점을 잘 잡아 주면서 치열한 디테일 싸움을 이끈다.


마지막은 ‘실험성’이다. <100분 토론>은 토론 방식과 토론 주제에 있어서 상당할 정도로 문호를 개방했다. 400회 기념 방송에서 신해철과 김제동을 출연시킨 것도 <100분 토론>의 열린 자세를 잘 보여 준다. 이런 실험성이야말로 정체되지 않고 장수할 수 있었던 비결일 것이다. 


400회 고지를 넘은 <100분 토론> 앞에 지금 큰 장벽이 서 있다. 바로 ‘MBC 민영화’라는 장벽이다. 미디어관계법이 개정되어 MBC가 민영화될 경우 <100분 토론>은 <PD수첩>과 함께 폐지될 프로그램 영순위로 꼽힌다. 우리 사회 좌우 소통의 통로가 되었던 <100분 토론>은 정권이 바뀌어도 그 역할을 멈춰서는 안 된다. <100분 토론>이 스스로의 존폐를 놓고 토론하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TVian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