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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논객 열전/진중권을 읽는다

'진중권을 향한 마녀사냥'에 블로거들 함께 맞서야

by 독설닷컴, 여행감독1호 2009. 5. 31.



편집자 주> '진중권은 또 하나의 노무현, 그의 말과 글을 지지한다'는 제목이 오해의 여지가 있어서 바꿉니다.
진중권 교수를 향한 마녀사냥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가해지기 시작한 것에 대한 우려를 담은 제목이었는데,
진 교수를 노 전 대통령에게 비교한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진 교수를 향한 공격이 도를 넘고 있고, 이에 진 교수가 '칼을 뽑을 때'라고 맞서고 있는 상황에서
그의 말과 글에 대한(그의 인생이 아니라) 지지 입장을 표명하는 글로, 덤덤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내가 백치면 김지하는 천치다.”
“2007년 대선 때 독재타도 외치던 사람은 바로 황석영씨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돈 남의 말 하고 계시니…. 기억력이 2초라는 금붕어도 아니고...”
"기억력이 나쁜 작가일수록 좋은 작가라는 미학이론은 들을수록 해괴하다. 금붕어의 눈앞에는 2초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니 최고의 작가는 금붕어다."



진중권의 말이 거칠어졌다. 언론이 그의 말 중에서 가장 거친 한 토막을 댕강 잘라서 보도하는 탓도 있지만, 그의 말이 거칠어진 것만은 사실이다. 상대가 황석영이나 김지하같은 원로 문인임에도 불구하고 적나라한 표현을 거침없이 쓰는 것은 ‘동방예의지국 콤플렉스’에 걸린 한국사회에서는 불필요한 논쟁을 낳을 수 있다.

원래부터 ‘인파이터’였지만, 최근의 진중권은 더욱 거칠어졌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해야 하는데, 머리까지 뜨거워진 느낌을 받게 된다. 촛불의 영향인 듯 보인다. 어른 대접을 받아왔으면서도 어른  역할을 못하는 황석영과 김지하와 난장을 펼치며 진중권은 마치 논개처럼 그들을 껴안고 논쟁의 강에 뛰어들었다. 

어찌되었건 그의 거친 말 덕분에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은 누리꾼뿐만 아니라 기자들에게까지 빠트리지 말아야 할 ‘성소’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품평을 빠뜨리지 않는다. 너무도 고상한 누리꾼들은 ‘진중’하길 ‘권’한다며 훈계하기도 한다. 고상한 세계를 꿈꾸는 그들의 비판을 들여다보면, 세상이 참 한가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논쟁 평론을 하면서 슬쩍 숟가락을 얹는 것은 논쟁에 참여하는 방법 중 가장 비겁한 방법 중 하나다. 
 
우리 토론문화에는 이상한 문화가 한 가지 있다. 말하는 내용보다 말하기 방식에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이는 달을 가리키는데 달이 아니라 손가락을 보면서 손톱을 깎았느니 안깎았느니 시비를 거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논쟁에 있어서 말과 글의 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다.

논쟁을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표현이 격해질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 상소문을 보면 ‘간신 누구누구의 고기를 먹고 싶다’라고 상소를 올린 사대부도 있었다. 이 격한 상소문을 올린 사대부를 나중에 요직에 천거한 사람은 단골로 욕을 먹던 훈구파였다. 그의 기개를 높이 사서 천거한 것이었다.  

논객들에게 있어서 거친 말은 피할 수 없는 ‘필살기’다. 그것은 논쟁이라는 원형경기장에서 유일하게 사용할 수 있는 창과 방패이기 때문이다. 논객은 말로써 공격하고 말로써 공격을 받아낸다. 때로 거친 말과 비꼬는 말은 따분한 논쟁의 ‘당의정’이 되기도 하고 무관심한 청중을 논쟁으로 이끄는 ‘삐끼’ 역할을 한다.


논쟁에 쓰인 언어를 가지고 공론장 밖에서 다른 기준을 들이대고 공격하는 것은
권투 시합이 끝나고 상대방을 폭력적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전쟁이 끝나고 상대방을 살인자라고 비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중권에 대한 공격이 주로 그러했다.

물론 논쟁의 언어라고 해서 모두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변희재가 지적했듯이 죽음을 희화화 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게임의 룰을 어긴 권투시합이고, 민간인을 공격한 전쟁이다. 
정몽헌과 남상국의 자살을 비난한 부분은 진중권 자신도 사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논쟁의 링에 오르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원형경기장에 오르는 것처럼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적의 목을 취하기 위해서는 내 팔과 다리를 내놓을 생각을 해야 하고 적의 팔다리를 취하기 위해서는 내 옷을 내놓을 생각을 해야 하는 냉혹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쟁의 세계에는 ‘주먹’만큼 ‘맷집’도 중요하다.

변희재 등 진중권을 비판하는 그룹이 그를 공격할 때 주로 공격하는 지점은 바로 ‘비전문가가 너무 나댄다’는 것이다(심지어 그들은 미학을 전공한 그가 영화(디 워)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비판한다). 그것이 합당한 비판일까? 논객(論客)은 ‘옳고 그름을 논하는 사람’으로 ‘객’이라는 글자가 보여주듯이 기본적으로 나그네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논쟁의 주제는 늘 변한다. 그러므로 ‘출장논객’ 진중권은 가장 논객다운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논쟁의 출발은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면 답이 나올 수 없다. 답을 내는 것은 전문가의 영역일 지 모르겠지만 문제를 내는 것은 누구에게든 열려 있어야 한다. 그 문제에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잘 아는 내용을 가지고 나와서 떠들면 된다. 뒤에서 숨어있지 말고.

논객으로서 진중권의 유일한 ‘핸디캡’은 진보신당에 입당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다 보면 입지가 좁아져서 논리가 흔들리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유시민이다. 유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 경호실장’을 자임하고 방어에 나설 때, 논객 유시민은 최악이었다. 그러나 진중권은 진영의 논리를 대변하기보다 진보진영의 입장에서 끝없이 문제제기를 하면서 논객의 정체성을 잘 지켰다.

그것보다 진중권에게 영향을 많이 끼친 것은 아마 촛불일 것이다. 촛불 현장에 투신하면서 그의 가슴과 함께 머리마저 뜨거워져 말이 거칠어지고 험해졌다. 제갈공명처럼 ‘촛불 책사’가 되어야 했을 그가 ‘촛불 검객’ 조자룡이 되면서 말과 글은 바로 쓸 수 있는 검과 창이 되어야 했다. 그 전과 후를 비교하면 변화가 확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진중권의 진화 과정으로 이해해줄 필요가 있다. ‘강단좌파 진중권’이 ‘현장좌파 진중권’으로 진화하는 과도기의 현상인 것이다. 촛불 국면에서 그는 가장 인상적인 논객이었다. 그는 온전히 몸을 던졌다. 폭력사태 한 복판에 뛰어들어 중재하다 얻어맞기도 하고, 진보신당이 HID에 백색테러를 당했을 때 현장에 달려가 사태를 수습했다.

처음에는 그의 그런 열정이 ‘강단좌파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보였지만 꾸준한 모습에서 진정성과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촛불을 칭송하며 온갖 수사학을 다 동원하면서도 제 몸에 촛농 한 방을 튀기기를 꺼려하는 좌파 지식인 난쟁이들 속에서 그의 존재는 높고 커 보였다. 

촛불 1년, 이제 진중권에게 남은 것은 보수 악다구니들의 공격뿐이다. 그가 남긴 거친 말과 글을 트집 잡으며 그를 공격하고 있다. 이에 그를 보호하는 성전에 동참하려 한다. 내가 그의 인생을 보호할 수는 없다. 그의 인생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그의 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참전하겠다. 진중권은 또 하나의 노무현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 하나의 노무현을 잃게 될 것이다.

(진중권 이야기는 몇 차례에 걸쳐 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독설닷컴'의 제안입니다.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음악회를 기획 중입니다.
'바보 노무현, 희망 음악회(가칭)'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시기 바랍니다.
누리꾼 여러분이 함께 기획했으면 합니다.

일단, 사회는 김제동씨가 보는 게 좋겠지요?

그리고 이 추모음악회를 시작의로 '제2의 희망돼지' 운동을 벌였으면 합니다.
그래서 '노무현 민주주의 재단'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그의 죽음을 '친노 정치 세력화'와 같은 정치이슈에 묻히지 않게 하고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시민이슈를 키우기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슬픔과 분노는 이제 그만 자제하고
노무현이 우리에게 던진 '민주주의'라는 화두를 살려나갔으면 합니다.